[문화역사이야기]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의 뿌리 "홍암 나철의 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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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의 뿌리 "홍암 나철의 대종교"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4.0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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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의 독립운동 과정은 '첫째 독립외교항쟁, 둘째 을사오적 처단, 셋째 대종교 창시해 민족정신 고취'

을사오적 처단 결행한 나철의 구국 항쟁 정신...민족의 항일정신을 일깨우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가열 찬 독립전쟁을 전개하는 초석

1906년 백두산의 백봉신사(白峯神師)가 보낸 ‘두암 백전선옹(頭巖 佰佺仙翁)’ 만나...대종교 중광(重光)의 출발점
홍암 나철 기념관/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 나철 기념관/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4) =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는 '홍암 나철 기념관'이 있다. 홍암 나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대부로서 한민족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우리 민족의 간절한 독립의 열망을 담아 대종교(단군교))를 중광했다. 이번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의 뿌리인 "홍암 나철의 대종교"로 ▲1편 홍암 나철 기념관 ▲2편 대종교의 역사와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 ▲3편 대종교 교도들의 독립전쟁과 후대의 평가로 전개된다.

홍암 나철 기념관/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 나철 기념관/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사(나철 사당)/홍암 나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사(나철 사당)/홍암 나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독립운동 선구자 홍암 나철 초혼비/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독립운동 선구자 홍암 나철 초혼비/기념관 소재. 2007년 4월 (사)홍암 나철 기념사업회에서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호촌에 안장된 선생님 묘소 흙을 채취해 고향 금곡마을 입구에 안장하고 초혼비를 건립했다. [정성환 기자]

◆ 홍암 나철 기념관

전남 보성군은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는 <홍암 나철 기념관>이 있다.

홍암 선생의 흔적이 서려 있는 나철 기념관은 홍암관, 대종교 독립운동관, 자료실, 홍암사(사당) 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나철이 걸어온 길을 통해 선생의 구국 이념과 나라 사랑 정신, 일제강점기 선열들의 애국혼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홍암 나철(羅喆 1863~1916)은 국학의 선구자,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으며 2005년 9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2008년 생가가 복원되고 2009년 그를 기리는 사당인 홍암사(弘巖祠)를 세워 그의 파란만장한 독립운동의 혼(魂)을 기리고 있다.

홍암 나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대부로서 한민족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동양평화, 인류 평등을 실현하는 구심체로써 우리 민족의 간절한 독립의 열망을 담아 단군교(檀君敎, 大倧敎)를 중광 했다.

나철의 사상은 일제강점기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청산리대첩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항일 독립전쟁의 구심점이었으며,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살아있다”라는 그의 절규는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큰 울림이었다.

나철 생가/보성군 별교읍 금곡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나철 생가/보성군 별교읍 금곡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 홍암 나철(弘巖 羅喆)의 생애

홍암 나철(1863~1916)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부친 나용집(羅龍集)과 모친 송 씨(宋氏)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나주이다.

본명은 ‘나인영’으로 대종교 중광 후 ‘나철’로 개명했다.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신동으로 태어난 나철은 다섯 살 무렵 호남의 유명한 한학자인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 1816~1868)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 해학 이기(海鶴 李沂1848~1909) 등과 교우했다.

매천 황현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4편의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한 우국지사였고, 해학 이기는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계승한 애국계몽운동가로서 나철과 함께 항일 운동과 대종교를 중광한 동지였다.

나철은 9살 무렵 서당에 나가 한학을 배울 때 한 글자를 알면 열 글자를 깨우쳐, 서당 선생은 금곡마을에 해동공자(海東孔子)가 태어났다며 감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전한다.

1882년(19세) 소과에 급제하고 20세가 되던 해에 나철은 서울로 상경해 부국강병을 주창한 온건 개화사상가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 1835~1922)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며 수학한 후 1891년(고종, 28세) 문과에 장원 급제한다.

조정에 출사한 나철은 정7품인 승정원 가주서, 1893년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1895년(32세) 징세 서장(현, 국세청장)에 임명되지만,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부임하지 않고 낙향해 10여 년간 은둔의 시간을 보낸다.

홍암 나철 흉상/전시실 [정성환 기자]
홍암 나철 흉상/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년 시절의 홍암 나철/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년 시절의 홍암 나철/전시실 [정성환 기자]

◆ 유신회(維新會) 결성

1904년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 진출의 대립으로 러일전쟁을 발발하자 일제는 한반도를 군사 요충지로 사용하기 위해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독도를 불법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1894년 청·일 전쟁에 이어 1904년 러·일 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를 인정해주는 대신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를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또한, 일제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영국으로부터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며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국권침탈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처럼 조선의 국운이 쓰러져 가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은둔했던 나철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결성해 구국운동에 일생을 바치게 된다.

나철의 독립운동 과정을 보면 첫째는 독립외교항쟁이고, 둘째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것이며, 셋째는 대종교를 창시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것임을 우리는 그의 일생을 통해 알 수 있다.

1905년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동지들.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좌측부터) [정성환 기자]
1905년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동지들.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좌측부터) [정성환 기자]

◆ 나철의 대일 외교항쟁

1905년 포츠머스 회담을 앞두고 국권침탈의 위기를 느낀 나철은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여론에 호소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외부대신 이하영(친일반민족행위자)을 찾아가 ‘조국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길 순 없다’라며 자신을 대한제국의 대표로 포츠머스 회담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하영의 반대와 일본공사(하야시 곤스케)의 방해로 나철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철은 포츠머스 회담 참석이 무산되자 1905년(42세) 10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외교항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나철은 “조선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이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서 협조하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일왕에게 보낸다.

나철 일행은 일본 왕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아무런 답변이 없자 황궁 앞에서 3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며 항쟁하던 중 을사늑약(1905.11.17.)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나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외교활동을 통한 항일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왕에게 보낸 그의 편지 내용을 대서특필하고, 그의 의로운 행동은 ‘동양평화론’과 ‘한국독립론’을 대외적으로 주장한 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1906년 귀국한 나철은 서울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두산의 백봉신사(白峯神師)가 보낸 ‘두암 백전선옹(頭巖 佰佺仙翁)’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重光)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때 나철은 ‘백전선옹’이라 불리는 도사에게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란 책을 받게 되는데 이 책이 현재 대종교 경전의 기본이 된다. 그 당시 나철은 구국운동이 절실한 상황이었기에 한가로이 책을 볼 여유가 없어 백전선옹(佰佺仙翁)으로부터 받은 책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을사오적 처단 결사대/전시실 [정성한 기자]
을사오적 처단 결사대/전시실 [정성한 기자]

◆ 을사오적 처단 결사대 자신회(自新會) 결성

대일외교항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철은 “매국노를 죽이면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1907년 오기호와 함께 20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해 을사오적(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을 처단하기 위해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한다. 나철은 군자금을 모아 결사대 30여 명을 선발하고 권총도 50정을 구매했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부족한 나철의 선발대는 을사오적 처단에 실패하고 자신회(自新會) 회원 30여 명이 체포돼 10년에서 5년의 유배형을 받았으며 나철 또한,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전남 신안군 지도(智島)로 유배된 지 4개월 만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석방된다.

이처럼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해 을사오적 처단을 결행한 나철의 구국 항쟁 정신은 훗날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일깨우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가열 찬 독립전쟁을 전개하는 초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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