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30세), 동포단합으로 일제를 무찌르고 국권 회복 〈인심단합론〉 주장...독립자금과 300여 명 의병 모집
안중근과 300여 명 ‘대한 의군’ 잇따른 승전 후 은 함경도 ‘영산’ 전투서 일본군 기습으로 패전....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마지막 결단 다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59) =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번 이야기는 안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발자취를 찾기 위한 「제 2편 안중근의 항일무장투쟁」이야기이다.
◆ 안중근의 본격적인 애국 계몽활동
1904년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강제로 대한제국을 군사기지로 사용하고 교통·통신기관을 접수해 노골적인 경제적 침탈을 자행했다. 이러한 일제의 한국지배 야욕을 눈으로 보고 느낀 26세의 청년 안중근은 일제에 저항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항일단체인 ‘보안회’를 찾아가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제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혼자서라도 목숨을 걸고 친일파와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한다.
1905년(27세) 일제의 강압과 을사오적(이완용,이지용,이근택,박제순,권중현)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무인 기질이 다분했던 안중근은 이 치욕적인 현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무렵 안중근은 간도와 연해주에서는 많은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이에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의논해 전 가족을 데리고 상하이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모은다. 안중근은 중국으로 떠나기 쉬운 평안도 진남포로 이주할 것을 아버지께 부탁하고 가족이 지낼 곳과 어떠한 방법으로 항일무장 투쟁을 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상하이로 향한다.
1905년 말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안중근은 갑신정변 때 화를 당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 등 동포들을 만나 독립투쟁에 나설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동포들을 모아 항일무장투쟁을 하겠다는 신념으로 낯선 땅으로 떠났던 27세의 안중근은 동포들의 외면에 좌절하고 만다.
동포들에게 크게 실망한 안중근은 상하이에서 아침기도를 위해 성당을 들렀다가 황해도에서 알고 지냈던 프랑스 출신 ‘르각’ 신부를 우연히 만나 일제에 대항할 방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게 된다.
조국을 떠나 만주나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에서 교육을 통한 실력향상과 계몽 활동, 민족의 단합 등 해야 할 일들도 중요하다는 ‘르각’ 신부의 충고를 소상히 들은 안중근은 그해 12월 고향으로 향했다.
1906년(28세) 귀국한 안중근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픈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었고,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 주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몸이 허약했던 안태훈은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멸망의 길로 치닫는 모습을 보며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진남포로 이사하던 중 숨을 거둔 것이다.
아버지 사망 소식에 몇 번이나 까무러쳤던 안중근은 부친의 혼백을 모셔둔 제사상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했던 항일독립운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안중근은 부친의 3년 상을 마치기도 전에 황해도 청계동을 떠나 새로운 항일운동을 펼치기 위해 평안도 진남포로 이사해 석탄회사와 채표(복권)회사를 경영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사업이 실패하자, 안중근은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신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고 힘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계몽 활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안중근은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전 재산을 처분해 처남인 김능권의 도움을 받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한다. 삼흥(三興)이란 선비(士)와 국민(民)과 나라(國) 모두가 흥해야 한다는 뜻으로 삼흥학교에서는 세계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영어교육에 힘쓰고, 천주교 계열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장이 되어 체육교육에 중점을 둬 민족의 단합을 위해 운동회를 개최하고, 무장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군대식 제식훈련 등 교련교육을 중요시했다.
이처럼 안중근은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서양의 신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학생들에게 신식 군사교련과 영어교육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교육계몽 활동에 나선 것이다.
또한, 1907년 대구의 독립운동가 서상돈의 주도로 전 국민이 성금을 모아 일제에 진 빚(국채)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안중근은 함경도 ‘국채보상기성회’에 참여해 민족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한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 통감부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만다.
1905년 외교권을 빼앗겨 국권을 상실하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문제로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처절한 모습을 지켜본 안중근은 교육계몽 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 등 민족운동으로는 국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안중근은 양반 신분으로 태어나 평등사상을 수용한 개화사상가로서 교육계몽 운동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고 국권을 회복하려 고군분투했으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결국, 국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안중근은 내 한목숨 버려서라도 항일무장 독립투쟁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국외 망명을 서두른다.
◆ 해외에서 펼친 항일 무장투쟁
1907년(29세) 8월 1일 안중근은 사랑하는 아내(김아려)와 6살 된 딸(현생), 3살 된 아들(분도), 그리고 돌도 채 지나지 않은 막내아들(준생)을 뒤로한 채, 조국의 광복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가족에 대한 애 닳는 마음을 가슴으로 부여잡고 발걸음을 재촉해 만주로 향한다.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 간도에 도착한 29살의 안중근은 간도 동포들이 일제와 청나라 관료들에게 억압당하며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간도에서는 의병조직이 어렵다고 판단한다. 안중근은 간도를 떠나 많은 조선 동포들이 살아가고 있는 연해주로 향했다.
연해주는 원래 청나라 땅이었으나 1860년 베이징 조약에 의해 러시아 영토가 된 곳으로 일본군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다.
1908년 연해주에 도착한 안중근은 연해주 청년회에 가입해 엄인섭·김기룡을 만나 의형제를 맺고 연해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본은 5년 내 러·청·미 3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한국의 큰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패망할 것이고 일본패망 후 또 다른 외국이 한국을 침략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침략에 대비해 의병을 일으켜 힘을 길러야 한다”라고 연설을 하며 의병모집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안중근은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은, 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 교만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단합해서 일제를 무찌르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라는 〈인심단합론〉을 연해주 주요 일간지 「해조신문」에 기고하며 우리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처럼 안중근의 절절한 심정이 담긴 연설과 호소문에 감동한 많은 연해주 동포들은 군수품과 독립자금을 기부했고, 젊은이들 또한 스스로 의병에 지원해 그 인원은 300여 명에 이르렀다.
드디어 안중근의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의지는 1908년 4월 연해주 얀치에(연추)에서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주도로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등이 발기인으로 나서 구국운동 단체인 ‘동의회’가 창설된다. 이때 안중근은 ‘동의회’ 의병부대인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며 목숨을 건 대일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한다. 300여 명밖에 안 된 적은 수의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홍의동’과 ‘신아산’ 전투에서 소규모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며 잇달아 승리한다.
그러나 안중근의 300여 명의 ‘대한 의군’은 함경도 ‘영산’에서 치른 3번째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고 안중근과 조두순 등 20여 명만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다.
영산전투의 패배는 안중근의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가 원인이었다.
안중근이 ‘홍의동’전투와 ‘신아산’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기 때문이다.
“일본군들은 우리 의병을 잡으면 참혹하게 죽이기 때문에 우리도 적을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라며 일본군을 석방하지 말고 죽여야 한다는 부대원들의 간곡한 의견을 듣지 않고,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대적한다”라며 일본군 포로들을 사살하지 않고 석방한 것이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인도주의적으로 포로를 석방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석방된 일본군 포로의 밀고로 인해 대한 의군 부대의 위치가 적에게 노출되었고, 일본군의 엄청난 화력에 의한 기습공격을 받은 280여 명의 ‘대한 의군’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나를 믿고 따르던 많은 ‘대한 의군’이 나로 인해 목숨을 잃었구나.”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안중근은 피신과 교전을 거듭하며 한 달 반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처절한 패잔병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본거지인 연해주로 돌아왔지만,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본 동포들의 냉대와 비아냥은 그를 가슴 아프게 했다.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 석방으로 인한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은 ‘사로잡은 적병은 죽이지 못하게 되어있다’라는 만국공법(萬國公法, 국제법)에 따라 포로를 풀어주어야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고, 대한 의군은 정의의 군대로써 행동도 정의로워야 일본의 침략에서 벋어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정의로움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안중근의 신념이었다.
안중근은 전쟁 중에 사로잡혀 무장 해제된 적들을 죽인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며, 일본군 포로 석방 조치는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 박애주의를 지키려 했던 그의 신앙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포들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 심한 좌절감에 빠진 안중근은 조국과 동지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의병부대 재조직을 모색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해 대한 의군을 와해시킨 패잔병으로 낙인찍힌 안중근에게 군자금을 지원해줄 사람도, 의병을 지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안중근은 노에프스키(연추)를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그리고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다음엔 ▲3편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 ▲4편 안중근의 유언과 순국> 편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