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대립은 여·순 항쟁, 제주 4·3항쟁 등 동족상잔 비극으로 이어져...
김구의 환국, 해방정국의 주인공이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작 알려...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 52]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중 「제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이다.
◆ 충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1938년 남목청 사건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김구는 창사를 떠나 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65세) 9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에 정착하게 된다.
김구는 마지막 임시정부인 충칭 시대를 열면서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연합해 임시정부의 단일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어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주석에 선출된다.
주석에 선출된 김구는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원대한 꿈을 펼치며 1907년 일제에 의해 해산된 우리 군대를 다시 일으켜 1940년 9월 17일 온 국민이 염원하던 임시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1941년(66세)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선전포고를 감행한다.
이것은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의 대한광복군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1942년 4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일부 병력이 광복군에 합류해 군사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고,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중국 각지의 동포와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우리 젊은이들이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광복군의 힘은 더욱더 강화된다.
나라가 없음에도 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인 광복군을 조직해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정보를 분석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45년(70세) 김구는 전쟁이 끝난 이후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에 대해 고민하며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협력해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이 작전의 계획은 광복군이 국내로 잠입한 뒤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으며, 이 작전의 목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해 전승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는 데 있었다.
김구가 열악한 여건 속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일제에 전쟁을 선포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국내진공작전’을 수립한 것은 종전 이후 전승국이라는 자격을 획득해야만 우리가 원하는 독립을 우리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김구의 노련한 외교적 국제감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전은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으로 안타깝게 실현되지 못했다.
김구는 국내 진공 작전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일본의 항복을 개탄했다고 한다.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했던 김구의 꿈이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산산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 군정 당국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 또한 무장해제 된 체 쓸쓸히 귀국했다. 이후 광복군은 1946년 해체되었고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해 활동하게 된다.
◆ 광복과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나라 잃은 설움과 고통으로 치욕의 35년 견뎌온 우리 민족은 내 나라 내 땅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지도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44년부터 해방이 되면 국내에서 자주적인 정부를 꾸리기 위해 조선 건국동맹을 주도했던 정치가 몽향 여운형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을 감지했던 조선총독부는 80만 명에 달한 일본인과 10만여 명의 일본 군인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여운형을 만나 협조를 구한다. 여운형은 해방 후의 혼란한 정국을 자주적으로 수습하고자 정치범 석방 등의 조건을 내세워 총독부의 협조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드디어 일제가 항복을 선언했다.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와 경성감옥에 수감 된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하고 반민족·반민족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을 결집해 8월 28일 안재홍·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했다.
건준의 활동은 각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새로운 조선의 완전한 독립 국가건설을 위한 시작이었으나 조선공산당 박헌영이 ‘건준’을 장악함으로써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아 실질적인 연대는 미비했다.
당시 ‘건준’은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단체로서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의 기능을 가진 조직이었으나, 김성수와 송진우 등 국내 민족 우파 세력들은 충칭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하며 좌익성향이 강한 ‘건준’을 비판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한다.
그런 와중에 ‘건준’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자 김병로 등이 ‘건준’에 가입하려 했으나 좌파 박헌영의 저지로 좌절되었으며, 민족주의자 안재홍 등이 ‘건준’을 탈퇴해 국민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러한 분열 속에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이틀 전인 9월 6일 건준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건준’의 박헌영이 조선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미 군정으로부터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임을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좌파들만의 조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고 공산당이란 이념 때문에 해방된 우리 민족은 좌우대립의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1945년 9월 8일 마침내 점령군으로 인천항에 도착한 미군의 하지 중장은 ‘맥아더 포고령 1호’에 따라 미군이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해 해방 후 3년간 남한지역의 직접통치를 발표하며 국내에서 치안,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38선 이남의 땅에는 오직 미군 정부가 있을 뿐, 그 외 다른 정부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 점령군으로 입성한 ‘하지’ 장군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미 군정은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통치 활동 및 권한을 철저히 부정했다.
그들은 총독부의 권한을 인수한 후 김성수와 송진우 등 우익인사들을 포섭해 일제강점기 친일파였던 관료·경찰·군인 출신들을 대거 미 군정에 고용한다.
이로써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된 대한민국은, 3·8선 이남 지역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미국 군인에 의한 통치를 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처럼 한반도가 미국에 의해 또다시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소 강대국에 의해 해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좌우대립으로 인한 통일 정부의 수립 실패로 인해 한반도는 결국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여·순 항쟁, 제주 4·3항쟁 등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 김구의 환국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 천황은 항복 의사를 내비친다.
1845년 8월 15일, 갑작스러운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항복 소식에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라고 심정을 토로하며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를 벗어나 해방되는 기쁨보다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김구는 연합국의 자격으로 승전국의 일원이 되어 독립을 쟁취하려 했으나, 갑자기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우리의 힘이 아닌 강대국의 힘으로 해방된다는 것은 그가 꿈에 그리던 해방의 모습이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하지 못한 채 갑자기 해방된다는 것은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게 이 소식은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준비한 참전준비가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백범일지」 中-
이처럼 해방은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갑자기 다가왔고,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적 대의를 모아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하는 길뿐이었다.
김구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꾸며 충칭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다.
1945년(70세) 11월 중국 정부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를 6000여 명의 인파가 뜨겁게 맞아주었다.
김구는 당장 고국으로 가길 원했지만, 김구와 임시정부 일행은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것을 강요했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 갈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 서약서에 서명하게 된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어떠한 공적인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을 허가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 서약서 中 -
1945년 11월 23일, 우여곡절 끝에 김구 일행은 대한민국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구는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무려 27년 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겨우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 요원 15명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지만, 귀국을 환영하는 인파는 전혀 없었다.
미 군정이 김구 일행의 귀국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교장’엔 백범을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고조되자 미 군정은 2분 동안 김구의 육성방송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처럼 김구는 일제 식민치하로부터 해방된 조국에서 또 다른 점령군의 지배를 받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나와 나의 각 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갖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시간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지만 오늘은 다만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백범일지」 中-
백범의 귀국 소식에 많은 국민이 환호했다.
뒤늦게 환영식이 열린 서울운동장에는 한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15만여 명이 몰려들었고 김구에게 거는 국민의 기대는 그렇게 각별했다.
김구의 인기는 미 군정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한 달 먼저 귀국했던 이승만이 보여주지 못한 정치력이었다. 김구는 이제 해방정국의 주인공이었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외상이 발표한 한국의 신탁통치문제는 우리 민족의 분열과 위기로 다가왔다.
한편, 이번 백범 김구 이야기는 총 9편으로 △1편 광주 백범기념관 △2편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 △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5편 김구의 한인 애국단 △6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과 대한광복군 창설 △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 △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의 분열 △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순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