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이야기③]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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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이야기③]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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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白凡), “가장 낮은 계층인 백정(白丁)과 평범한 범부(凡夫)...'지극히 평범한 사람'
백범 호, 애국심이 나 정도는 되어야...독립을 위한 간절한 소망 '강조'
1919. 3. 1 전국 방방곡곡서 대한독립 만세운동 들불처럼 일어나..
1919. 9. 11 이승만 대통령, 이동휘 국무총리...‘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김구, 1919년(44세)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등 요직 거쳐..."대한민국임시정부 전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 발판"
광주백범기념관/광주시 학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백범기념관/광주시 학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8]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중 「제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다.

 

■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김구 선생 어록/쟁두쟁족(爭頭爭足)/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 어록/쟁두쟁족(爭頭爭足)/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황해도 광진학교 교사 시절 김구와 학생들(1906)/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황해도 광진학교 교사 시절 김구와 학생들(1906)/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김구의 교육계몽 운동

1903년(28세) 마곡사를 벗어난 김구는 기독교에 입교한 후 ‘한없이 가지고 싶은 높은 문화의 힘’은 교육을 통해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본격적인 교육계몽 운동에 전념한다.

그는 황해도 일대에 광진학교를 설립하고 광진학교·봉양학교·서명의숙과 양산학교의 교사가 되어 신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했다.

김구는 청년들을 통해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탈을 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고 그들에게 쟁족(爭足) 할 것을 가르친다.

백족지충(百足之蟲)은 지사불강(至死不僵)이다, "발이 여러 개면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쟁족(爭足)은 민주주의 조직의 원리이기 때문에 민중의 토대가 없이 우두머리가 있을 수 없고, 하층 기본조직 없이 중앙의 영도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구는 “사람들은 여럿 모이면 서로 ‘머리’ 즉, ‘우두머리’가 되려고 쟁두(爭頭)를 하지만, 낮고 힘든 일은 저마다 먼저 하려 하고, 높고 쉬운 일을 서로 사양한다면 다툼이 없어진다”라고 하며 ‘머리’가 되려고 싸우지 말고 ‘발’이 되려고 애쓰라는 쟁족(爭足)을 강조한 것이다.

김구가 교육계몽 활동에 한창이던 1904년(29세) 한반도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일본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정책과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한반도와 만주에서 러·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결국, 1905년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빼앗기고 사실상 일제식민지로 전락한다.

신민회 주요 인사/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신민회 주요 인사/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05인 사건/용수를 쓰고 재판정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05인 사건/용수를 쓰고 재판정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신민회와 105인 사건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사실상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김구는 이동녕·이준 등과 함께 을사늑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조약반대 시위집회를 주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구는 힘에 의한 무장독립운동만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32세 되던 해인 1907년 국내 최대 비밀 항일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해 국외 독립기지 건설을 위한 독립자금 모금 활동에 전념한다.

신민회는 1907년 김구·안창호·신채호 등 독립지사들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 결사 단체인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인해 해산된다.

105인 사건의 발단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 체포된 ‘안악사건’에서 시작된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을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으로 조작해 독립운동가 600여 명을 체포하고 123명을 기소해 105인에게 징역형을 선고해 투옥한 사건(안명근 사건, 안악사건)이다.

이때 김구는 1911년(36세) 양기탁을 비롯한 애국지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1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김구는 감옥에서 고문을 받던 당시, 일본제국을 위해 밤을 지새우며 고문하는 일본 경찰들을 보면서 자신은 과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한다.

김구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 “언제가 우리나라 독립정부가 출범하면 나는 청사의 마당을 쓸고 지키는 문지기가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1914년 옥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자신의 호를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의 범(凡)을 따 백범(白凡)으로 고쳤다.

백범(白凡)이란 “가장 낮은 계층인 백정(白丁)과 평범한 범부(凡夫)를 뜻하는 것으로 자신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김구 자신이 이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사람들의 애국심이 적어도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된 국가의 국민이 될 수 있다”라는 독립을 향한 김구의 간절한 소망이 백범(白凡)이란 호에 담겨있다고 한다.

1915년(40세)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 김구는 4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가석방되어 황해도 안악 안신학교에서 교육계몽 활동에 헌신하며, 당시 도박과 가난에 찌들어 피폐해진 농촌사회를 변화시키고자 1917년(42세) 황해도 신천 동산평 농장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과 상부상조 정신을 일깨웠다. 또한, 농장 안에 학교를 세워 소작인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가르치며 농촌계몽 활동을 펼쳐나간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제1열 좌측 3번째 김구. 제2열 우측 5번째 안창호. [사진=정성환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제1열 좌측 3번째 김구. 제2열 우측 5번째 안창호. [사진=정성환 기자]

 

◆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1910년대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빼앗긴 무단통치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치활동이나, 언론, 집회의 자유가 박탈당했다. 일제 헌병 경찰들은 즉결처분권을 이용해 많은 항일운동가를 탄압하고 학살·투옥했다.

즉결처분권이란 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조사를 하지 않고도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만주나 연해주로 떠나야만 했다.

당시 만주에서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한창이었다.

서간도에서는 이회영과 이동녕 등이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의병부대인 대한독립단과 서로군정서를 조직했으며, 북간도에서는 이상설과 김약연이 서전서숙과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서일 등이 대종교를 중심으로 중광단(북로군정서)을 조직해 일제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설립되어 1920년까지 약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간도참변을 겪으면서 폐교되었지만,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지역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등 의열단과 대한민국 광복군으로 활약하면 독립전쟁을 펼쳐나간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지금의 명동 일대가 전부 그의 땅이었다고 하며, 지금의 시세로 환산하면 600억 원 정도 되는 조선 최고 갑부 집안이었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급히 처분해 독립자금을 마련해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신민회를 도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가 만주(간도)에 터를 잡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기지건설을 하고 있을 무렵인 1914년, 세계는 전쟁에 휩싸인다. 제국주의 전쟁인 세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때 영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자, 1905년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영·일 동맹을 맺은 일본 역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그리고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레닌이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을 지원할 것을 선언하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민족자결주의는 “그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가 결정해야 하며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는 나라가 독립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독립을 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는 약소국가들이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일 등 패전국의 힘을 없애기 위한 전략으로, 승전국의 식민지는 해당하지 않는 내용이었기에 조선은 여전히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레닌의 식민지 해방 지원 선언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나라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고 독립을 위해 대외적으로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3.1운동/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3.1운동/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3·1운동 만세시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3·1운동 만세시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레닌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김규식·여운형·김철 등 국외 망명 독립운동가들은 조직적인 독립운동단체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해 대외적인 독립운동을 할 무렵인 1919년 1월 약속국가의 해방을 주장할 수 있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 이것은 ‘신한청년단’에게 독립을 주장할 기회이며 희망이었다.

신한청년단은 즉시 외교에 능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격으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파리강화회의는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으로 하지만 이 원칙은 세계대전의 패전국에게만 적용된 것으로 일본은 승전국인 연합국이었기 때문에 일제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 2월 1일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길림성에서 조소앙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심장부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다.

이처럼 세계를 향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독립 선언서 발표는 이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해외에서 활발한 독립활동이 전개되고 상하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일본의 유학생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독립을 향한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국내 민족주의 지도자와 학생들은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에 항거하며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 탑골공원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시위운동이 폭력사태로 번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탑골공원에 오지 않았고,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요릿집)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제 경찰에 자진 신고해 스스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학생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탑골공원에 모인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자적인 선언식을 거행하고,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3·1 만세운동은 시작된다.

세계 최초 식민국가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만세 독립운동에 놀란 일제는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벌여 3개월 동안 7,500여 명을 학살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냈다.

특히 일제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무차별 사격과 함께 교회를 불태워 버린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저지른 최악의 만행으로 영국 출신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촬영한 사건 현장이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일제는 멸시와 조롱과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민족의 역량을 총집결해 일제에 항거한 3.1만세 운동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된 민족국가임을 전 세계 곳곳에 알렸다.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해외 각지에서 조직적인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시작으로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우고,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거쳐 ‘한성 정부’를 수립한다.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서 이끌어나갈 정치단체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단일화된 임시정부 통합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지만, 어디로 통합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달랐다.

무장투쟁 독립을 주도한 이동휘 등은 만주나 연해주에 통합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교독립을 중시한 이승만 등은 상하이에 통합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서울의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상하이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흡수 통합해 외교파인 이승만을 대통령, 무장투쟁파인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선출해 1919년 9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에 기초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한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계기는 상하이가 영국·프랑스 등 세계 강대국들의 외교 무대인 국제도시라는 지리적 이점을 외교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영국은 일본과 동맹국이었기에 우리나라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함께 일본이 청일전쟁을 승리로 빼앗은 요동 반도를 청에 돌려주도록 강요했던 삼국 간섭의 당사자였기에 일본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와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당시 상하이의 프랑스 자치구는 중국과 일본의 국가권력이 미치지 않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미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을 상대로 안전한 외교전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그러나 외교 독립운동이란 이유로 독립투쟁의 중심지인 만주와 연해주가 아닌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둔 것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실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독립전쟁의 최고 지휘부가 전쟁지역을 벗어나 상하이에 있었기에 신속한 현장지휘를 할 수 없었고,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상해임시정부와 만주·연해주의 독립투쟁 현장에서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많은 혼선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백범 김구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구는 1919년(44세) 3·1운동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을 겪으며 조국에서는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중국 상하이로 향한다.

그리고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할 무렵인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다.

김구는 상해에 도착해 신민회 활동을 하면서 알고 지냈던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겠다’라며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받아주길 간곡히 부탁한다.

“도산은 내가 벼슬을 시켜주지 않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그러는가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서대문 감옥에서 옥 살이 할 때 후일 독립 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될 것을 결심하며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쳤다는 것을 예로 들며 평소 나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도산은 뜻밖에도 경무국장 임명장을 줬다.” -「백범일지」中-

도산 안창호의 신임을 받은 김구는 1919년(44세) 상해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임명된다.

당시 경무국장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호하고, 일본의 밀정과 반역자를 색출해 처벌하는 막중한 임무를 담당했다.

이후 김구는 1923년 내무국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선임되고,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알리며 독립전쟁의 발판을 마련한다.

한편 이번 백범 김구 이야기는 총 9편으로 △1편 광주 백범기념관 △2편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 △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5편 김구의 한인 애국단 △6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과 대한광복군 창설 △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 △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의 분열 △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순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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