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이야기②]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隱居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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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이야기②]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隱居家)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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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서 명성황후 시해 일본인 살해'..."정의의 복수, 독립운동의 시작"
차하포 사건 사형 선고...고종이 “국모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처단” 내용 접하고 사형 집행 중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 마을 김광언의 집, 23세 청년 김구가 잠행 중 45일 정도 은신했던 곳
보성 은거가서 시국의 흐름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정기 일깨워...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7] 정성환 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 김구 선생이야기 중 「제2편 치아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隱居家)」다.
 

치하포 사건(1896.3.9.) [사진=정성환 사건]
치하포 사건(1896.3.9.) [사진=정성환 기자]
치아포 사건으로 투옥된 인천감리서/백범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치아포 사건으로 투옥된 인천감리서/백범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탈옥 후 은거 경로(1890)/전시실 광복 후 삼남 지방 순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탈옥 후 은거 경로(1890)/전시실 광복 후 삼남 지방 순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

1895년 10월 8일 새벽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와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는 의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날 무렵, 청나라 정세를 파악하고 고향으로 향하던 김구에게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치하포 사건>이 운명처럼 다가온다.

1896년(21세) 3월 8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 있는 한 주막에 머무른 김구는 분명 왜놈인데 단발머리를 하고 흰 두루마기 한복 속에 칼을 숨기고 조선인 행세를 하는 왜놈을 발견하게 된다.

김구는 이자가 국모를 시행한 미우라와 공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는“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 국가의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 왜놈을 처단하리라” 결심한다.

김구가 격투 끝에 왜놈을 살해고 그의 소지품을 확인해 보니 일본군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였다. 김구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김구는 자신이 일본군을 죽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당당했다.

그는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쓴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여놓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김구의 담대하고 당당한 모습은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나, 그것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에 대한 정의의 복수였고, 죽음을 각오한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897년(22세) 김구는 일본 경찰에 살인죄로 체포된다.

김구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그를 죽였다”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 감리서(형무소)에 갇혀 형 집행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의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 법정에서 일본 순사를 꾸짖으며 -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김구의 사면을 위해 노력했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부잣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김구는 글을 몰라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게 된 죄수들을 위해 글을 가르치고, 청원서를 대신 써주었으며,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신학문의 서적을 탐독하고 서양문물을 접하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자신의 의지를 정립해 나간다.

김구는 투옥 중에 그동안 그가 오랑캐로만 여겼던 서구 나라들이 발달 된 제도와 문물을 가진 선진국이었다는 사실을 신서적 등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김구는 자신이 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일본인 몇 명을 죽이는 것보다, 백성들을 널리 가르쳐 그들이 이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가 해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한 이유를 명확히 깨우치게 된다.

“서양의 역사를 기록한 「태서신사」 한 권만 보더라도 저 눈이 푸르고 코가 우뚝한 서양 오랑캐들이 오히려 더 선진적인 법규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요대를 두른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에게는 오히려 오랑캐라는 이름조차도 아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백범일지 中 -

사형 선고를 받고 투옥 중이던 김구는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고종이 뒤늦게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을 처단했다”라며 항변한 김구의 진술 내용을 접하고 사형 집행을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김구가 사형 집행 중지가 이루어진 날은 고종이 있던 경복궁과 김구가 수감 돼 있던 인천 사이에 처음으로 전화가 설치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고 하니, 만약 전화가 더 늦게 설치되었더라면, 김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김구는 다행히 사형을 면하지만, 일본의 압력 때문에 석방되지 못하고 미결수로서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김구는 아무리 기다려도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탈옥을 결심한다.

결국, 김구는 죄수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하지만, 정처 없이 떠도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김구 선생이 은거했던 곳(김광언의 집)/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이 은거했던 곳(김광언의 집)/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 은거기념관/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 은거기념관/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일지. 백범휘호/백범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일지. 백범휘호/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 선생이 은거 중 사용했던 우물/보성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 선생이 은거 중 사용했던 우물/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전남 보성군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백범 김구 은거기념관과 은거가(隱居家)

인천 감리서를 탈옥한 1898년(23세) 3월 김구는 서울을 거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 지방을 잠행하며 일본군의 눈을 피해 은거하게 된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 마을은 안동 김씨 집성촌으로 23세인 청년 김구가 잠행 중 김두호라는 이름으로 45일 정도 은신했던 곳이다.

김구는 김광언의 집에 머물며 뒷산 바위에 올라 체조도 하고 바위 밑에 흐르는 물에 멱을 감으며 지냈다고 한다.

특히 지역민에게 시국의 흐름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는데 그가 떠난 후 쇠실 마을에는 공부하는 붐이 일어나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김구는 이곳을 떠나며 김광언의 부인 ‘선’ 씨로부터 ‘필낭’을 선물 받고 답례로 자신이 보던 한국 역사서인 「동국사기」를 건넸으며, 이 책에는 당시 김구의 가명인 김두호의 서명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남긴 한시 ‘이별난’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 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떠나네

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넷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이별난 중에서-

해방 후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는 이 마을을 떠난 지 48년이 지난 1946년(71세) 9월 22일 자신을 숨겨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쇠실 마을의 김기옥(김광언의 손자)을 방문한다.

김구는 옛날을 회상하며 보살펴준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가가호호를 찾아가 대형 존영과 휘호 등을 하사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은 김구의 하사품을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전한다.

김구 선생이 이 집에 머문 기간은 45일 정도로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생각하면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짧은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작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김구 선생의 모습은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보성군 삼정리 쇠실 마을은 48년 전 망명할 때 수 삼 개월이나 머물렀던 곳이다.… 내가 48년 전 유숙하여 글을 보던 고 김광언 씨의 가옥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환영하니, 불귀의 객이 된 김광언 씨에 대한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 「백범일지 」中 -

현재 쇠실 마을에는 김광언의 집이 남아있으며, 후손들이 「동국사기」를 보존하고 있으며, 보성군과 마을 주민들은 1990년 ‘백범김구선생은거추모비’, 2006년 ‘백범김구은거기념관’을 건립해 김구와의 인연이 더욱 빛나고 있음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김구 선생 은거 기념 식수/마곡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 은거 기념 식수/마곡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당/충남 공주 마곡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당/충남 공주 마곡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마곡사/충남 공주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마곡사 은거

전라도 함평과 보성을 떠나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 공주 마곡사에 도착한 김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며 세상의 모든 번뇌를 뒤로하고 승려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6개월 동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불경을 외우며 수양에 정진하다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3년 동안 수도승으로 살게 된다.

그러나 김구는 끝내 속세의 번뇌를 지울 수가 없었고, 이제 산사는 그의 터전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일제의 야욕 앞에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 조선의 운명을 외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치하포 사건 이후 신학문을 접하며 교육운동가의 자질을 키운 김구는 “지식을 업신여기고 애국심이 빈약한 이 나라 국민에게 나라가 곧 자기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무엇으로도 나라를 구할 수 없다”라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교육을 통해 구하고자 산사를 벗어나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김창수라는 이름으로는 살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김구는 자신의 이름을 김구(金龜)로 바꾸게 된다.

한편 이번 백범 김구 이야기는 총 9편으로 △1편 광주 백범기념관 △2편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 △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5편 김구의 한인 애국단 △6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과 대한광복군 창설 △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 △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의 분열 △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순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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