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제,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 다산초당에서 18년의 유배 생활 보내...
강진 다산초당 동암(東庵)에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 저술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1]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로 칭송받은 『다산 정약용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서』 △제4편 전남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년의 여정이다. 1~4편에 이어 △5편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一表二書) △6편 18년 만의 귀향...다음 세상을 기다리며도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 사의재(四宜齋)
1801년(40세) 11월, 정약용은 머나먼 바닷가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다.
강진 사람들은 유배된 죄인을 싫어하여 죄인이 머무르는 집 대문을 부수거나 담장을 허물어뜨리기도 했기에 그 누구도 그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약용은 다행스럽게도 의(義)롭고 정(情) 많은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철저히 홀로된 정약용을 보고 측은히 여긴 주막집 할머니가 거처할 방 한 칸을 내준 것이다. 이곳이 강진 읍내 동문 밖 샘 거리에 있었던 흙으로 지은 토담집으로 정약용이 4년 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는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 몇 날 며칠 술로 마음을 달래며 힘든 유배 생활을 시작하지만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라며 스스로 위로하며 끝내 붓을 든다.
그리고 42세 되던 해인 1803년 정약용은 자신이 머물던 주막의 조그마한 방 한 칸을 공부방으로 만들어 사의재(四宜齋)라는 편액을 걸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사의재(四宜齋)란 생각이 맑아야 하고, 외모는 장중해야 하며, 언어는 과묵하고,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용모·언어·행동의 네 가지를 의(義)로써 마땅히(宜) 지켜야 한다는 정약용의 생활철학이 담겨있다.
이것은 자신의 수양방법인 동시에 유배 생활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품격을 잃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정약용을 사학에 빠진 천주교 교인으로 전혀 믿지 않았다.
주위에서 지켜본 정약용은 참으로 훌륭했으며 조선의 천재 실학자답게 학문 또한 깊었다. 정약용의 훌륭함에 매료된 고을 아전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데리고 와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정약용은 자신의 철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한(恨) 많은 유배 생활의 괴로움과 아픔을 이겨나간다. 이처럼 조선 개혁 정신의 상징이자 실학의 정점이었던 고독한 철학자 정약용의 다산 실학의 출발은 사의재(四宜齋)에서 시작된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18년 동안 네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사의제,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을 옮겨 다니며 8년의 세월을 보내고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까지 다산초당에서 10년을 보내게 된다.
◆ 보은산방(寶恩山房)
1805년 정약용은 유학과 시에 능통한 백련사의 혜장선사(1772~1811)를 만나 교우하면서 차(茶)를 알게 되었고, 주역을 논하며 학문적 토론을 통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이러한 인연으로 혜장 선사의 도움을 받아 보은산에 있는 고성사 보은산방(高聲寺 寶恩山房)에서 1년 반을 지내게 된다.
이후 산사를 떠난 정약용은 그의 애제자 ‘이청’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귀양살이 8년째인 1808년 마침내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몰두하며 학문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내면서 정약용은 강진의 유명 인사가 된다.
◆ 다산초당(茶山草堂)
정약용이 강진 유배 생활 후반부 10년을 살았던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 마을에 사는 정약용의 외가 종친인 해남 윤씨 ‘윤단’의 산정(山亭)이었다.
정약용은 어느 날 ‘윤단’의 초대를 받고 산정을 가게 되는데, 아름답고 아늑한 산정의 경치에 매료되어 윤씨 집안에 머물기를 청했다고 한다.
윤씨 집안은 이를 허락했고 이렇게 해서 머문 곳이 ‘다산초당’이다.
다산(茶山)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애칭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茶山)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정약용은 1808년부터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을 하며 자신이 꿈꾼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나간다.
정성을 기울여 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며 자신을 다산초부(茶山樵夫)라 불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단의 산정은 실학의 산실 다산초당으로 거듭난다.
<다산초당 茶山草堂>은 정약용이 유배 시절에 10년간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다산초당’ 좌·우에는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이 있다.
송풍암(松風庵) 또는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東庵)은 정약용이 기거하며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선진유학을 연구하며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을 저술한 곳이다.
동암은 다산동암(茶山東庵)·보정산방(寶丁山房)이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1976년 강진군에서 복원했다.
다산초당(茶山草堂) 편액과 보정산방(寶丁山房) 편액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다산초당(茶山草堂)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이란 편액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며, 보정산방(寶丁山房)이란 편액은 정약용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부탁을 받고 추사 김정희가 평소 다산을 스승으로 존경하는 마음에 ‘보배롭게 다산을 생각하는 방’이라는 뜻으로 써준 현판이라고 전한다.
서암(西庵)은 다산초당 입구에 있는데, 주로 윤단의 아들과 손자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으로 차를 나누며 밤늦도록 학문을 연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으로 불렸다고 한다. 1808년에 지어진 서암은 오랜 세월 동안 발길이 끊기고 잡초만 무성해 흔적만 남았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고 한다.
다산초당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다산초당 옆 산비탈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 다산초당 앞뜰에서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였다는 다조(茶竈, 차 부뚜막), 다산초당 약수, 동암에 걸려있는 보정산방(寶丁山房) 편액, 다산초당의 옆 조그마한 연못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다산 5경>이라 불리며 후세에 전해져 오고 있다.
<천일각 天一閣>이란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인 말로, 다산이 정조대왕과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학문을 잠시 쉬고 외로움을 달래던 곳이라고 한다.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인데, 1975년 강진군에서 다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천일각(天一閣)을 세웠다고 한다.
동암(東庵)에서 천일각으로 가다 보면 왼편으로 백련사로 가는 길이 있다. 800여 미터에 이르는 길가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이 장관을 이룬 이 길은 정약용이 백련사의 명승 혜장 선사를 이어주는 사색의 통로였다고 전한다.
<5편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 一表二書>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