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1752~1800) 승하 후 순조 즉위...노론의 천주교 박해 절정 신유박해 후 정약용 3형제 등 남인 몰락
독실한 천주교 신자 정약종 순교...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0]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로 칭송받은 『다산 정약용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서』 제3편 '개혁 군주 정조의 죽음과 사라져간 정약용의 꿈'이다. 1~3편에 이어 △4편 강진 유배 생활 18년의 여정 △5편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一表二書) △6편 18년 만의 귀향,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는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 정조의 죽음
1800년(39세) 노론 벽파의 시기와 탄압의 칼날을 피해 정조 곁을 떠나 고향 마제로 돌아온 정약용은 온갖 굴레에서 벗어나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은 편지를 보내 그를 다시 부른다.
정약용은 자신의 안전을 꾀하기 위해 임금의 극진한 총애와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기에 그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조는 그가 조정에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800년 6월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정약용에게 정조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으며 정조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정약용은 젊은 시절, 천주교를 조선말 사대사상과 명분론에 매몰된 성리학의 대안이자 개혁적인 사상이라고 여겼고, 정조 임금을 혼탁한 시대의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개혁적인 군주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나라에서 억압하는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정조와 함께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개혁적인 현실정치를 선택했지만, 그는 노론 벽파의 끊임없는 견제와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가 그토록 믿었던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향한 그의 꿈도 좌절되고 만다.
정약용은 수원으로 떠나는 정조의 장례행렬을 지켜보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미련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 마제마을로 돌아온 정약용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서재에 걸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여유(與猶)’라고 이름 지은 이유를 소상히 밝힌 ‘여유당기(與猶堂記)’를 집필한다.
정약용은 <노자 老子>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혜약섭천(與兮若冬涉川, 머뭇거리는 마치 겨울 내를 건너듯), 유혜약외사린(猶兮若畏四隣, 두리번거리기는 마치 내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구절이 너무나 자신의 처지와 흡사해 ‘여유(與猶)’를 당호로 삼았다고 한다.
여(與)와 유(猶)는 원래 짐승 이름인데, 의심과 겁이 많아 소리만 나면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버리는 짐승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두렵고 조심한다는 뜻의 여(與)와 유(猶)라는 당호에서 그가 벼슬살이하면서 얼마나 많은 반대파의 공격에 마음조였는지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이것은 정약용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계의 뜻도 있지만, 자신의 성품을 절제하고 배양하는 수양의 자세를 갖겠다는 결의를 여유당(與猶堂)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신유박해(辛酉迫害)
조선 시대 문예 부흥기를 이끌었던 개혁 군주 정조대왕(1752~1800)은 정약용을 극진히 신임했다. “그대밖에 없다. 문장에서도 그대를 능가할 자 없고, 100년 만의 재상 재목은 그대밖에 없다”라며 정약용을 극찬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01년(40세)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한다.
그리고 정순 대비가 어린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면서 칼자루를 쥔 노론의 천주교 박해는 절정을 이루며 피의 숙청이 시작된다. 이것은 정약용 3형제를 비롯해 남인들의 몰락을 예고한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천주교 금지령을 공포했지만, 도탄에 빠진 백성과 진취적 사고방식을 가진 유생들 사이에서 천주교 사상은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었다. 이에 정순 대비는 천주교도를 인륜에 역행하는 반역 집단으로 규정하고 전국의 천주교 교인들을 일제히 검거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그리고 ‘오가작통법’을 시행해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다.
결국, 정약용 삼 형제를 비롯 이승훈·이가환 등 남인들이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돼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된다. 그 당시 정약용의 형제들에게 천주교는 새로운 사상이자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에 반하는 천주교를 새로운 사상으로 수용할 수 없는 폐쇄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독실한 신자였던 정약종은 형틀에 묶여 혹독한 고문을 받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저는 본래 이것을 정학으로 알았지 사학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비록 만 번의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며 흔들리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죽겠다’라며 형틀에 목덜미를 대고 하늘을 바라본다. 망나니의 첫 번째 칼에 죽지 않았던 그는 다시 일어나 십자성호를 긋고 두 번째 칼에 성직자다운 의연함을 잃지 않고 순교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노(정약종 세례명)는 서울 서소문에서 생을 마감하고, 남인의 영수 이가환과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 등 수많은 백성과 남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천주교인 박해는 100여 명이 순교하고 400여 명이 유배를 갈 만큼 잔인하고도 혹독했다. 이처럼 신유박해로 남인 시파의 수많은 인재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어 정계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노론들의 살인 광풍 속에서 형과 일가친척 정치적 동지들을 모두 잃은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의 목숨은 아직 살아 있었다.
1791년 윤지충의 진산사건으로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 큰 파문이 일어나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천주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고,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개혁 군주 정조를 위해 천주교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의금부에 투옥되어 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죄가 없음을 항변했다. 그리고 셋째 형 정약종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된다. 정약용은 끝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던 셋째 형 정약종이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죽음을 선택하리라 생각했다. 정약용은 심문과정에서 자신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셋째 형인 정약종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고, 천주교인들을 찾아내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게 정약용은 필사적으로 살고자 했다.
다행히 정약종의 책 상자 속에 “너의 아우(정약용)가 알지 못하게 하라”는 서찰과 함께 정약종이 쓴 글에서도 “형제와 함께 서학을 익힐 수 없으니 나의 죄가 아님이 없다”라는 글귀가 발견된다.
이것은 정약용이 천주교도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분명했다.
이에 정약용과 약전 형제는 참형을 면하고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현, 포항시 장기면)으로, 정약전은 전남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역사는 이 참혹한 사건을 신유박해(辛酉迫害)라 기록했다.
정조 사후 19세기 초 조선왕조는 안동 김씨에 의한 3대 60여 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해 왕권은 추락하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유교적 이념에 매몰된 조정 대신들의 무능은 변혁의 시대로 도약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하지 못했고, 서양문물의 배척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좌절시켰다.
결국, 노론 벽파들의 전횡과 세도정치의 부정부패로 인해 멸망의 늪에 빠진 조선왕조는 국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틈바구니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제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사건
1801년(순조 1년)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된 지 7개월 만에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생과 사의 갈림길에 들어서게 된다.
천주교 신자 황사영(정약용의 큰형 약현의 사위)이 베이징 주교 ‘구베아’에게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한 일과, 그 대응책으로 군함과 군대를 조선으로 보내 천주교 박해를 막아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협박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백서(帛書)를 보내려다 발각된 것이다.
그것은 분명 역모였다. 결국, 황사영은 대역 죄인이 되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당하고 그의 가족과 노비들은 유배된다.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난 이후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유배지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문초를 받아야만 했다. 황사영은 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기에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노론 벽파의 홍낙안 등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라고 하며 이번 기회에 정약을 죽여야 한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것은 남인의 씨를 말리려는 노론의 철저한 정치적 보복이었다.
그러나 정약전과 정약용이 황사영과 내통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1797년(36세) 정약용이 처음 곡산 부사로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아직도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다는 상소문 때문에 정약용 형제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또다시 유배길에 오른다.
◆ 정약용 형제의 유배길
1801년(40세) 유배길에 오른 정약용 형제는 한양을 떠나 금강을 건너 보름이 지나 전라도 나주의 ‘밤남정 주막집(율정점 栗亭店)’에 도착했다. 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형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지를 향해 떠나야만 했다. 아무리 잠을 청해보지만, 정약용 형제는 기약 없는 이별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약용은 형제가 나란히 유배지로 떠나는 기구한 운명에 한스러웠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멀리 떨어진 외딴섬으로 유배를 가는 형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밤남정 주막집’의 마지막 밤은 정약용 형제의 영원한 이별의 밤이 되고 있었다.
눈물로 밤을 보낸 정약용·정약전 형제는 1801년 11월 1일 나주의 한 삼거리(율정 栗亭)에서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목놓아 울면서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헤어짐이 생에 마지막임을 두 형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4편 강진 유배 생활 18년의 여정>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