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장군'의 충의 정신이 깃든...광주 '경열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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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장군'의 충의 정신이 깃든...광주 '경열사' 이야기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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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해군 창설의 주역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말 최고의 영웅
광주 농성동-광주역의 '경열로'...정지장군을 기리는 도로명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 이야기9 = 이번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는 우리나라 조선 수군의 시조(始祖) 경열공 '정지 장군'의 이야기이다.

정지 장군은 최영·이성계 장군과 함께 고려말 최고의 영웅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지 장군은 최초로 전함을 건조해 왜구를 토벌했으며 수군의 창설이 ‘정지’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농성동에서 광주역 교차로까지의 <경열로>는 정지 장군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다. 

경열사/사당 [사진=정성환 기자]
경열사/사당 [사진=정성환 기자]

<경열사>는 고려말 왜구를 무찔러 나라를 지킨 경열공 정지(1347~1391)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우이다. 그는 용장으로서 충의(忠義)와 절개(節槪)가 굳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사후 국가가 장례를 주관하고 경열(景烈)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1644년(인조 22)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명동에 경열사를 세워 배향하고, 1719년(숙종 45) 그의 9세손 충무공 정충신 장군과 구성군 전상의 장군 등 8인을 함께 배향하였으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896년 이 터에 경렬사 유허비를 세워 선현을 뜻을 기렸다.

경열사 표지석비 [사진=정성환 기자]

1916년 하동정씨 문중에서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에 경열사를 다시 건립하였으며, 1978년 ‘정지장군유적보존회’의 노력으로 정지 장군의 ‘예장석묘’가 있는 현재의 위치에 사우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 완공하였다. 

정지장군(鄭地將軍) 영정 [정성환 기자]
정지장군(鄭地將軍) 영정 [정성환 기자]

현재의 사우는 모두 철골 기와로 지어졌으며 사당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경내에는 사우(경열사), 내삼문, 외삼문, 유물관 등의 건물이 있으며, 옛터인 동명동에서 옮겨온 경열사유허비(景㤠詞遺墟碑)와 유적정화기념비(遺蹟淨化紀念碑) 등이 세워져 있다.

사당 뒤쪽 언덕 위에 정지장군예장석묘(鄭地將軍禮葬石墓)가 있으며, 묘비는 1808년 세운 것이다. 이 묘는 전형적인 고려 시대 ‘예장석묘’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열사 입구/홍삼문 [정성환 기자]
경열사 입구/홍삼문 [정성환 기자]

정지장군(鄭地將軍 1347~1391)은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준제(准提)였으나, 후에 지(地)로 이름을 고쳤다.
정지 장군(1347~1391)이 태어난 나주시 문평면 죽곡마을에는 소를 맨손으로 잡은 정지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정지 장군이 어린 시절 소를 몰고 가던 농부가 소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하자 어린 ‘정지’가 몸을 날려 소를 죽이고 소 주인의 목숨을 구한 어린 정지를 지켜본 사람들은 ‘정지’가 훗날 큰일을 할 인물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외삼문=충의문(忠義門) [정성환 기자]
외삼문=충의문(忠義門) [정성환 기자]

정지 장군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장대했으며, 성품이 너그러웠다. 그는 독서를 좋아해 많은 서적에 능통했으며, 남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곤 했다고 한다.

19세 때 사마시(소과)에 장원을 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출사했다.
1374년(공민왕 23) 당시 왜구는 서·남해안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아 백성들의 삶이 매우 피폐했다. 이때 중랑장이었던 정지 장군은 평소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고 있었던 왜구를 소탕하기 위한 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는 <바다를 이용해 건너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아야 하며, 육지의 백성들은 배를 조종하는 데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나, 해전 참여를 희망하는 사람만을 골라 5년간 훈련 시켜 해안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사전에 소탕해야 한다”는 수군 창설 계획서인 <왜구 토벌책과 토적 책 10조>를 공민왕에게 올렸다. 

내삼문/경앙문(景仰門) [정성환 기자]
내삼문/경앙문(景仰門) [정성환 기자]

이후 ‘정지’ 장군은 전라도 ‘안무사’에 임명되어 수군 창설에 전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군 창설이 이뤄진 과정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나라 해군의 시조(始祖)인 정지 장군에 대해 <최초로 전함을 건조해 왜구를 토벌했으며 수군의 창설이 ‘정지’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지장군 유적정화 기념비 [정성환 기자]
정지장군 유적정화 기념비 [정성환 기자]

1377년(우왕 3)부터 1380년(우왕 6)까지 정지 장군은 순천과 낙안을 침범한 왜구를 소탕했으며, 영광, 광주, 옥과, 담양, 화순 등지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1382년(우왕 8) 해도 원수가 되어 진포(충남 서천)에 침입한 왜선 50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다.

1383년(우왕 9) 정지 장군은 남해 관음포에서 전선 47척으로 12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여 17척을 침몰시키고 2천여 명의 왜군을 살상하여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가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나세 장군과 최무선의 <진포대첩>,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과 더불어 고려 시대 말 4대 대첩 중 하나인 <관음포 대첩>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유물관 [정성환 기자]
유물관 [정성환 기자]

남해의 관음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던 중 전사한 가슴 아픈 곳이기도 하지만, 정지 장군의 관음포 대첩은 1389년(창왕 1) 박위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해군잠수함 가운데는 해군 창설의 주역 정지 장군의 이름을 붙인 ‘정지함’이 있다.

1387년(우왕13) 정지 장군은 대마도 정벌을 자청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유물관/광음포 대첩 기록화 [정성환 기자]
유물관/광음포 대첩 기록화 [정성환 기자]

정지 장군은 전투 중에 전사한 시신을 남김없이 수습하여 가족의 품으로 인도했으며, 또한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어 고을 주민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관음포 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정지’ 장군이 남해에 입성하자 남해 백성들이 그의 인자함과 덕을 기리며 석탑을 세웠다.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해에 있는 ‘정지 석탑’은 그 당시 백성들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다.

유물관/정지석탑(모조품) [정성환 기자]
유물관/정지석탑(모조품) [정성환 기자]

 이렇게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존경받았던 장군이었지만 그의 관직 생활에도 어려운 고비가 있었다. 

1388년 이성계와 함께 요동 정벌에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합류했으나 그는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는 반대했다.

그러던 중 무신 ‘김저’가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간 뒤 풀려났다.

이후 고려의 무신 ‘윤이·이초’가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침략하려 한다>고 무고한 <윤이·이초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때 마침 대홍수로 민가와 옥사가 침수되자, 공양왕은 <정지 장군과 이색 등은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석방했다. 

경열사 유허비 [정성환 기자]
경열사 유허비 [정성환 기자]

그러나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고초를 겪은 정지 장군은 광주로 낙향하여 무등산 자락 장원봉 아래 지산동에 은거하다, 1391년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어 개성판부사(開城判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깊어 부임하지 못하고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정지장군 갑옷/보물 제336호/광주광역시 역사민속박물관 소장. [정성환 기자]

고려 시대 장군 정지(1347~1391)가 착용하던 고려 시대 갑옷으로 현존하는 경번갑(鏡幡甲)이다.

총 길이  70㎝, 가슴둘레  79㎝, 소매길이  30㎝로 된 이 갑옷은 철판과 철제 고리를 엮어 만들었다.

정지 장군의 갑옷은 몸통 부분은 철판을 배치하고 어깨와 소매 부분은 철 고리만을 연결하여 보호성와 활동성을 동시에 갖췄다.

목둘레 부분과 앞면 아랫부분이 손상되어 있으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정지 장군 후손들의 얘기에 의하면 정지 장군의 유품으로 갑옷과 칼이 전해져 왔는데 칼은 정지장군의 외손인 김덕령 장군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가지고 간 후 없어졌다고 한다.  

정지장군 예장석묘 전경 [정성환 기자]
정지장군 예장석묘 전경 [정성환 기자]

 

정지장군예장석묘(鄭地將軍禮葬石墓)/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 [정성환 기자]

<정지장군 예장석묘>는 1391년(공양왕 3) 왜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정지 장군을 예장(禮葬)한 묘이다.

예장이란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그의 충의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국가에서 장례를 주관해 치른 국가장이다.

정지 장군의 예장석 묘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방형으로 석축 기단 위에 호석을 쌓은 부부합장묘이다.

무덤을 네모꼴로 만들어 가장자리를 돌로 두른 것은 고려 후기의 무덤 양식으로 우리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경열공 정지장군 사적비(景㤠公鄭地將軍事蹟碑) [정성환 기자]

우리나라 수군을 창설한 해군의 시조(始祖)  정지 장군은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광주 농성동에서 광주역 교차로까지의 <경열로>는 정지 장군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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