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때 후금과 전투에서 순절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 = 광주의 3 충신, 전상의 장군의 충의 정신이 깃든 충민사(1)
전상의 장군의 생애 (1572~1627·51세)
1879년에 간행된 「광주읍지」의 ‘충신전’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의로운 충신 14명이 기록돼 있다.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충렬공 고경명 장군, 충장공 김덕령 장군,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구성공 전상의 장군은 국가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아 ‘광주의 3 충신(忠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충민사는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 백상루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며 순국한 구성 도호부사 구성공 전상의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포충사와 충장사는 박정희 대통령 때 유적정화사업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립된 사당이지만 충민사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에서 사당 건립사업계획을 세우고 첫 사업으로 지금의 충민사 입구 좌측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당 건립이 중단되고 정부 지원이 끊어져 충민사 건립이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광주 3 충신 중에 전상의 장군 한 분만 사당이 없었기 때문에 사당 건립이 절실했다고 한다.
결국,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의 도움과 전남도민의 혈세를 투입하여 1982년 착공하여 1985년 충민사가 완공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상의(1575~1627) 장군은 선조 8년 광주목 도촌면(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병정놀이하면서도 항상 대장이었고 성년이 되어서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6세 때에 ‘회재서당’의 박광옥 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1603년(선조 36년) 29세 때 무과에 합격해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장군은 무술도 뛰어났지만, 외교수완도 탁월하여 1617년(광해군 9) 일본에 회답사(통신사)로 파견돼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고, 장군은 광해군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내금위 어모장군(정3품)에 임명됐다.
내금위 어모장군은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 직책쯤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북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여진족의 추장 ‘누루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합해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건국하고 신흥강국으로 부상하여 명나라와 첨예한 대립 관계에 있었다.
위기를 느낀 명나라는 조·명 연합군을 편성하여 후금을 공격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했다.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의 군주는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전통적인 사대주의 외교를 추구하기보다는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실리 위주의 중립외교를 펴면서 임진왜란 이후 무너져가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며 위기를 돌파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조선의 파병을 요청하자 모든 조정의 대신들이 명나라는 우리에게 부모의 나라이고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았으니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군대 파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군대를 파견하여 후금에 패했을 때 조선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기에 광해군은 끝까지 군대 파견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매몰된 조정 대신들과 지방의 유생들은 군대 파병을 해야 한다고 하나같이 들고 일어나니 광해군도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하고 도원수 강홍립 장군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강홍립 장군의 조·명 연합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패하자 강홍립 장군은 광해군의 밀명대로 후금에 투항하고 ‘누르하치’를 만나 “조선이 전투에 합류한 것은 명나라의 압박 때문이었으며, 조선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도움을 받은 것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것이며, 조선은 후금과 다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며 조선은 중립적이다”라는 광해군의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후금과 일말의 친선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후금과의 전쟁도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광해군의 현명한 정세판단으로 조선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강홍립 장군에게 밀명(密命)을 내린 사건은 서인 세력들에 의한 인조반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1623년 능양군(인조)과 서인들은 폐모살제와 명과의 사대관계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서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전상의 장군 또한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이 강등되어 평안도 개천군수(종4품)로 좌천돼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안주목사 김준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인조와 서인 세력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으며 조선은 전쟁의 위기에 휘말리게 된다.
1626년 후금의 ‘누루하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에 패한 후 병사하고 후금의 2대 황제로 태종 홍타이지가 즉위했다.
홍타이지는 왕자 시절부터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배후인 조선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을 수 있었고, 후금의 대기근과 조선과의 경제 교류도 끊겨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문제를 타개할 방안으로 후금은 조선을 먼저 정벌하고 물자를 확보하여 후방의 후환을 없앨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처럼 조선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괄의 난 당시 후금으로 도주한 잔당들은 인조의 ‘친명 배금’ 정책을 홍타이지에게 일러바치면서 후금과 친하게 지내려는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당했다며, 조선의 군세는 극히 미약하니 조선을 침략한다면 앞장서 길을 안내하겠다며 나서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을 정벌할 결심을 하게 된다.
1627년(인조 5) 1월 후금은 광해군 폐위의 부당성과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을 문제 삼으며 홍타이지의 사촌 형 ‘아민’이 이끄는 후금의 3만 대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은 인조가 ‘친명 배금’ 정책을 표방함으로써 전쟁을 자초했으며, 이괄의 난으로 북방의 1만여 명의 정예병사가 해산되고, 이미 평양 방어선이 무너진 상태에서 후금군이 쳐들어오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힘없는 조선의 백성은 후금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재산은 약탈당했으며,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을 건넌 후금군은 이틀 만에 의주와 정주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평안도 안주성을 공격했다.
이때 구성 부사 전상의 장군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 장군과 안주 목사 김준 장군과 함께 안주성을 지키며 후금의 선발대를 막아냈으나, 중영을 지키던 남이흥 장군과 김준 장군이 중과부적으로 모든 군사가 궤멸 되자 적에게 무기를 내어줄 수 없다며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불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최후까지 남영을 지키고 있었던 전상의 장군은 군량이 고갈되고 구원병도 오지 않은 고립무원의 절박한 상황에서도 후금의 3만 병력의 남하를 5일간 막아내며 백상루에 홀로 남아 끝까지 항전하다가 1627년(인조5) 51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절했다.
일설에는 백상루 전투에서 전상의 장군은 패전을 직감하고, 마지막 순간 군사들에게 “우리는 군량과 무기도 다 떨어졌다.
구원병도 오지 않고 남이흥과 김준 장군이 지키는 중영은 이미 함락됐으니 이는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이곳을 사수할 것이니 너희는 빨리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후일을 도모하라” 명하니 장졸들이 눈물을 흘리며 흩어졌다.
그는 홀로 백상루에 올라가 적을 향해 남은 화살을 모두 쏘고 나서 적들에게 포위되자 그는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4배를 올린 후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순국했다.
이를 지켜본 후금군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장군의 충절에 감동하여 ‘충신열사의 주검은 일반병사와 함께 둘 수 없다’라고 하며 장군의 시신을 백상루 앞에 안장한 후 묘비를 세워 예를 표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안주성을 함락시키고 계속 남하하던 후금은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친 조선과의 전쟁이 부담스러웠고, 특히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조선 의병과 관군들이 합세해 후금군을 압박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후금은 진퇴양난의 길목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결국, 후금은 조선에 강화를 제의하게 되고, 조선으로서는 후금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기에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치욕적인 ‘형제의 맹약’을 맺고 후금군은 철군하게 된다.
역사는 패전국으로서의 치욕적인 이 사건을 ‘정묘호란’이라고 기록했으며,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로지 ‘친명배금정책’을 고집하다가 후금의 침략을 받아 힘없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죽임을 당하게 한 무능한 정권이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