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를 놓고 신탁과 찬탁이라는 좌파와 우파의 극한 분열과 대립에 빠져...
김원봉,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이승만의 '단정론' 반대...중도좌파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 고군분투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9) =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이다. 그는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의 행보에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원봉은 김일성에게도 숙청당했다. 독립운동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로 '제6편 좌·우익 대립과 민족의 분열'이며, 제 7편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은 추후 연재된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
여운형은 일본의 패전과 민족의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서 1944년 8월 비밀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해 중앙과 지방조직을 갖추고 군사행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하고 미 군정 주둔 전까지 각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안정시키고 사실상 정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초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여운형은 정부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 9월 6일 ‘건준위’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9월 7일 월미도를 통해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미 군정 이외에 어떠한 정치 단체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군이 남한에 진주할 때까지 조선의 치안과 행정은 조선총독부에 위임한 상태였다. 미 군정은 포고령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조차도 부정했다.
당시 미 군정은 이러한 단체들은 국민에 의한 보통선거와 같은 공식적 정부 수립절차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당시 한반도 주민들의 대부분이 임시정부가 아닌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한반도의 정부로 인정하고 입국시킨다면 한반도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미국은 판단한 것이다.
미 군정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해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으며 한국의 미 군정이 실시 된다. 당시 미 군정은 김성수·송진우 등 우익중심의 한국민주당과 친일 경찰 등 친일파들을 그대로 미 군정청에 고용하고, 한국인들에게 지지가 높았던 이승만을 한국민주당과 연대하도록 했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김구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1945년 12월 2일, 29년 만에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김원봉은 전국 군사 준비위원 회의 고문으로 추대돼 국군 장교 양성 학교인 조선 국군 학교 교장으로 임명되고, 중도좌파 몽향 여운형과 함께 좌익계열의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활동하게 된다.
◆ 모스크바 3상 회의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모여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 독립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회의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30년간의 신탁통치를 하자는 미국의 제안에 대해 조선의 민주주의적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하자는 소련 측의 수정안을 제안함으로써 미·소 양측의 의견을 절충하고 영국의 동의를 거쳐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하고,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임시정부와 협의해서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결정한다”라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최종안이 1945년 12월 28일 발표된다.
◆ 동아일보 오보 사건
1945년 12월 27일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동아일보 오보 사건이 발생한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라는 동아일보 첫머리 기사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미국, 소련, 영국의 외상들이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합의했는데, 특히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보도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의사항이 발표되기 전인 1945년 12월 27일 보도한 것으로, 출처가 불분명한 잘못된 보도임에 틀림이 없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고, 즉시 독립을 주장한 것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스크바 3 상회의 합의안은 주로 소련 측의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주요 내용은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기 위해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협의해서 임시정부가 원하면 최장 5년 기한으로 4개국이 신탁통치한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 의한 ‘조선임시민주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그 정부와 협의를 거치지 않으면 신탁통치를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한, 이 합의문의 신탁통치는 ‘조선임시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임시정부와 협의한다는 잠정적인 ‘후원’의 성격이 강했으며 신탁통치 또한 미국이나 소련 일방이 아닌 4개국의 협조하에 실시한다고 규정했기에 남·북 분단의 소지도 없었다. 특히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한 중요한 사항은 ‘조선임시민주정부’수립이었고 신탁통치는 ‘조선임시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만 부각해 왜곡 보도함으로써,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에게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지배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졌다.
일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겪은 민중들은 처음에는 좌파와 우파 모두 한목소리로 반탁운동에 나서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박헌영 등 좌익세력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면서, 좌·우파들의 반탁과 찬탁의 극심한 대립 속에 민족이 분열되고 통일된 정부수립을 이루지 못한 한반도는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된다.
◆ 신탁통치에 대한 찬탁과 반탁의 영향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최종목표는 신탁통치가 아니고, 한국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한국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이고,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면 미소 공동위원회와 임시정부가 함께 협의해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즉, 모스크바 3상 회의 궁극의 목적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최우선으로 한국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본질이었다.
그런데“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라는 동아일보 첫머리 기사 하나로 한국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라지고, 오로지 “신탁통치 자체를 동의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가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했는지 또는 실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확실한 건 동아일보 보도내용 이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이 전국을 뒤흔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임시정부 세력의 김구, 이승만·김성수 등 우익세력, 박헌영 등 좌익세력도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표명한다.
당시 해방된 한반도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이 70% 이상 우세했기에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남한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 군정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이라는 오보 때문에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라는 오보 때문에 미국과 우익세력은 정치적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해 모스크바 3상 결정 관련 보도를 확인하면서 좌익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선회한다. 좌익의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절대 지지는 ‘조선민주임시정부’수립을 지지한 것이며 신탁통치 찬·반과는 엄밀히 다른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익은 ‘조선민주임시정부’수립에는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신탁통치 절대 반대만을 주장했다는 것은 3상 결정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한반도 여론은 3상 회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찬탁과 반탁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좌파와 우파의 극한 분열과 대립에 빠져있었다.
‘조선민주임시정부’수립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오로지 반탁은 애국자이고, 찬탁은 매국노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사회주의자(좌익)였고, 친일 경찰 등 친일파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자(우익)였는데 해방 이후 신탁통치 문제로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면서 찬탁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는 소련과 북한에 동조하는 공산주의 빨갱이로 매도돼 매국노가 되어버렸고, 반탁했던 친일 경찰 등 친일파는 반공주의자가 돼 애국자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이승만은 1946년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 연설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남한단정론’을 주장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도 우익세력과 좌익세력은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에 반대하고,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 우파 김규식은 미 군정의 지원을 받아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좌·우 합작 운동 전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출범하지만, 모스크바 3상 결정에 동의하는 자들만 임시 민주 정부에 포함 시키자는 소련과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동의 여부 상관없이 모든 정치세력을 임시 민주 정부에 포함 시키자는 미국과의 의견대립이 평행선을 달리며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된다.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우익 사이에 찬탁운동과 반탁운동의 대결이 더욱 극심해지는 가운데 이승만은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 각료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설득시키고 귀국해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 연설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정읍 발언, 단정론)”라고 주장하자, 김구는 이승만의 ‘단정론’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인해 한반도에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려는 원대한 꿈이 무산될 위기에 놓인 미 군정은 반탁을 주도했던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세력을 배제하고, 이승만의 ‘단정론’을 저지하려는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의 좌·우 합작 운동을 지원하는 가운데, 약산 김원봉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대한민국을 영구히 분열시키고 분단시키는 매국적 행위라고 비난하며, 중도좌파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을 통한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고군분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