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의 절의정신과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혼과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기여
붕남 지응현 선생, 진정한 나눔의 정신과 사회지도층으로서 책임을 몸소 실천한 광주의 의로운 선각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95) =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에는 병천사(秉天祠)가 있다. 병천사(秉天祠)는 지씨문중(池氏文中)과 붕남 지응현(鵬南 池應鉉, 1867~1957) 선생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국혼을 함양하기 위해 건립한 호국선현(護國先賢)의 사당(祠堂)이다. 이번 이야기는 '광주 서구 병천사를 찾아서'이다.
◆ 병천사(秉天祠) 연혁(沿革)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우리 민족은 호국 선현의 애국 애족 정신을 추모할 사우를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될 무렵,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광주 지역의 유림은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고려말 공신 의제 지용기, 임진왜란 때의 영웅 금남 정충신, 병자호란 때의 명장 지여해·지계최 등 다섯 분의 선현을 소규모로 배향해 왔다.
당시 이 배향에 참여한 붕남 지응현 선생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공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애국혼을 함양하기 위해 다섯 분의 영정을 봉안하는 서원을 건립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서원의 위치를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 금호리(심곡리)로 정하고 서원의 사당 명칭을 “천리(天理)를 병집(秉執) 한다”라는 뜻에서 병천사(秉天祠)로 지었다.
그리고 회갑년(回甲年)을 맞은 1927년, 광주의 부호였던 붕남 최응현 선생은 지씨문중(池氏門中)의 희사금과 자신의 기부금으로 500여 평의 대지 위에 본격적인 사우 건립을 추진해 1932년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병천사(秉天祠)라는 서원(書院)을 건립하게 된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병천사는 우리 선조들의 절의 정신과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혼과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 병천사 공간구성
병천사는 현정문(賢正門)과 현전(賢殿), 병천사 사당(秉天祠 祠堂), 영정각(影幀閣), 존심당(存心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거경재(居敬齋) 등으로 구성돼있다. 영정각(影幀閣)에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임진왜란 당시 이치 전투의 공신 금남 정충신(錦南 鄭忠信, 1576~1636). 그리고 지씨문중(池氏門中)으로서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르고 순절한 의재 지용기(毅齋 池涌奇,1330~1392). 병자호란 때 큰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철산 지여해(鐵山 池汝海, 1591~1636)와 표곡 지계최(豹谷 池繼崔, 1593~1636) 등 다섯 분의 위패와 붕남 지응현(鵬南 池應鉉)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제향(祭享) 공간은 병천사 사당을 중심으로 사당 앞에는 현전(賢殿)이 있으며 내삼문인 현정문(賢正門) 앞에는 사적비(事蹟碑)와 묘력비(廟歷碑)가 세워져 있고, 외삼문인 광제문(光霽門)이 있다. 강학(講學) 공간은 동재인 숭인재(崇仁齋)와 서재인 집의재(集義齋), 강당인 존심당(存心堂)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외삼문 앞 광장에는 붕남 지응현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와 기적비 등 14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 붕남 지응현(鵬南 池應鉉) 선생의 생애
조국의 농촌진흥과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붕남 지응현 선생은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에 태어났다. 유년시절 짚신을 팔아 가난하게 살면서 온갖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지응현 선생은 평생을 농촌진흥에 헌신하며 근검과 화목을 생활신조로 검소하게 살았다. 지응현 선생은 만석 군의 지주로서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가장 적게 받은 선덕을 베풀어 소작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당시 지응현 선생의 은혜를 받은 소작인들이 광주 학동을 비롯해 장성, 담양, 곡성, 구례, 화순, 보성 등지에 70여 개의 공적비를 세웠는데 이것은 붕남 지응현 선생의 진정한 나눔의 정신과 사회지도층으로서 책임을 몸소 실천한 광주의 선각자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로 붕남 지응현 선생은 1903년(고종) 36세 때 종9품 참봉(參奉)의 벼슬을 받았으며 그 후 주임관(奏任官)을 거처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까지 승진했다.
붕남 지응현 선생의 조상은 대대로 갑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 대에 이르러서 가산이 기울자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로 이사와 가난한 생을 이어갈 무렵 지응현 선생이 태어난다. 지응현 선생은 9세 때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진 것이라곤 땅 두 마지기가 전부였다. 그는 16세 때부터 포목상과 미곡상 등 장사를 하면서 근검절약으로 돈을 모아 21세 때부터 땅을 매입하기 시작해 1930년대에 이르러 그가 소유한 토지가 광주는 물론 장성, 나주 등 9개 고을에 485정보(1,455,000평)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힘들게 모은 모든 돈으로 농업만이 부흥의 길이라는 생각에 많은 땅을 사들여 광주의 전설적인 부호가 된 것이다.
그가 사들인 토지가 얼마나 되는가는 당시 “외지에서 광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지씨 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었다”라는 일화를 통해 엿 볼수 있다. 당시 지금의 대인동 대성 약국 일대, 금호동, 상무대 부지, 지원동 일대가 그의 땅이었다고 전하며, 그의 소작지는 순천, 보성, 광주, 나주, 장성, 담양, 곡성, 순창까지 널려 있었다고 하니 그가 소유한 땅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응현 선생은 흉년에는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감면해 주는 등 많은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투철한 도덕의식은 많은 소작인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소작인들은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지응현 선생은 애국심이 강한 선비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송사 기우만(1846~1916) 의병장을 찾아가 군량미를 제공하고 1920년 무렵 현준호, 김성수 등과 함께 호남은행을 설립해 호남 민족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했으며, 광주의 간이학교인 숭명 학교에 자신의 땅 150여 평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지응현 선생은 우리 민족의 아픔과 가난을 가슴으로 품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의로운 선각자였다.
◆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 설립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회갑을 넘긴 지응현 선생은 모든 사업을 큰아들 옥천 지창선(玉川 池昌宣)과 함께 추진해 나간다.
지창선(池昌宣)은 일본 명치 대학에서 수학한 후 ‘광주청년회’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농업부흥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중농주의자’였다. 그는 아버지 지응현 선생과 뜻을 같이해 토지개량과 간척사업, 금융업, 광업 등의 사업을 농장형 경영형태로 전환해 ‘봉남농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농업을 부흥해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을 설립한다.
당시 지주들은 대부분 농업 이외의 사업에 투자해 돈벌이에 골몰했지만, 농업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지응현 선생은 조선이 부강해지려면 농촌이 잘 살아야 하고, 농촌이 잘 살려면 농촌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는 아들 지창선과 함께 농업진흥을 위해 1934년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을 설립해 운영한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응세농민독본(應世農民讀本)』을 간행하는 등 교육사업과 농촌지도자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 교훈》
“하늘을 존경하고 땅과 친하며 스스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 삼라만상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을 보호하고 봉사하라. 스스로 반성하고 스스로 닦으며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라.”
당시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의 교훈은 일제강점기 땅의 소중함에 대한 조선인의 민족성을 일깨우기 위한 계몽 활동이었다. 학생 수는 24여 명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졸업자들이었다. 학생들은 1년 과정을 거쳐 겨울 농한기에는 이론을 배우고 농번기에는 실제 농사를 지어 본인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분배받아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 모든 것은 무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초 일본 해군이 상무지구에 있던 비행장을 접수하고 조종사 양성을 위한 숙소와 훈련 등의 시설물을 신축하면서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 부지가 일본군의 군용지로 징발되자 지응현은 지금의 조선대학교 부근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들 지창선이 주장했던 “축산업만이 농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덴마크식 ‘축산부국론’을 받아들여 ‘응세농도학원’을 ‘응세수의학교’로 전환해 발전시켜나간다. 그러나 농업학교와는 달리 수의학교는 운영비가 너무나 많이 필요했고, 설상가상 이 땅이 농지 개혁이라는 정부 시책에 포함되면서 가산은 더욱더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지응현은 이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고 은거하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어느 날 “나라는 망했으나 민족의 정기가 끊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사회지도층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일생을 보냈던 붕남(鵬南) 지응현 선생은 1957년 10월 6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현재 지응현 선생의 영정은 유림의 공론에 따라 병천사 영정각(影幀閣)에 봉안돼있다.
◆ 제하상모자비(祭鰕商母子碑)
붕남 지응현 선생은 광주의 대표적인 부호로 ‘응세농도학교’와 ‘응세수의학교’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고 다양한 빈민구제 활동과 지역사업을 펼치는 선정을 펼쳤다. 병천사 외삼문 앞뜰에는 지응현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특히 새우젓 장수 모자(母子)를 위해 제사를 지내라고 새겨진 ‘제하상모자비(祭鰕商母子碑)’가 눈길을 끈다.
이 비석은 지응현 선생의 인품을 대변하는 사연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응현 선생(당시 50세)은 19년 전인 1900년 10월 말, 새우젓 장수 모자가 그의 집(당시 대전면 중리)에 와서 며칠 동안 머무르며 가져온 짐을 잠시 맡겨 놓고 쌀을 벌러 나갔는데 십여 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모자가 맡겨둔 짐에서 썩는 냄새가 풍겨 그 짐을 열어보았더니 새우젓 8말, 백미 닷 되, 목화 다섯 근이 있었다고 한다. 지응현 선생은 이것을 잘 말려두고 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한 달여가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는 어찌할 수 없어 이것을 2원 5전에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6년 동안 투자한 결과 본전과 이자를 합해 10원 97전 6리로 늘어났다. 지응현은 이 돈으로 논을 사서 동리에 맡기고 소작료로 한 섬씩을 내놓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아무리 기다려도 모자가 돌아오지 않자 지응현 선생은 모자(母子)가 이미 죽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들이 집을 나간 10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후 이 사실을 새긴 비석을 동네 앞에 세우고 먼 훗날에도 잊지 않을 증표로 삼게 하라고 했다. 이후 지응현 선생이 광주로 이사와 금호동에 병천사를 세운 뒤 이 비석을 옮겨와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 붕남 지응현 선생의 가족
붕남 지응현 선생은 4남 4녀를 두었다. 부인 광산 김씨(김 계)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6·25 전쟁 때 불타버린 원효사를 중건하는 데 힘썼다. 원효사 경내에그의 공적을 새긴 공덕비가 세워질 무렵 김씨는 사위인 서양화가 오지호 화백을 불러 불화를 그리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때 오지호 화백이 그린 불화가 현재 원효사에 걸려있다.
그의 후손 지용 씨의 사연도 역사의 흐름 속에 슬픔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날조한 극우세력 ‘지만원’은 2018년 병천사를 건립한 지응현 선생의 손자 지용(池龍, 옥천 지창선의 아들, 1942~ ) 씨를 북한 특수군인 ‘광수 73’이라는 가짜 뉴스를 퍼트려 광주시민의 울분을 사기도 했다. 지용 氏는 5·18 민주항쟁 당시 38세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의 학살에 분노하며 총을 들었고, 계엄군과 전투를 벌인 시민군이었다.
또한, 지용(池龍) 氏 가문은 서구 쌍촌동의 대건신학교(현, 가톨릭 평생교육원)와 동구 지산동 살레시오 여자고등학교, 서구 금호동 상무초등학교 부지를 사회에 기증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