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월계동 장고분, 영산강 유역 마한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분 14기 중 2기
월계동 장고분 둘러싸고 논란...일본 고유의 무덤 vs 근거 없는 역사 왜곡
"일본 극우세력과 일제 식민사학자들도 올바른 역사관 되찾아야...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고하고, 일본 역사 왜곡엔 단호하게 대처해야"
![광주광역시 월계동 73번지 장고분 입구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00_3230.jpg)
![광주광역시 월계동 소재 장고분/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제20호 [정성환 기자]<br>](/news/photo/202502/210071_199599_3053.jpg)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96) = 고분은 수많은 유물을 담고 있어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이번 이야기는 영산강 유역 마한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분 중 하나인 광주광역시 월계동 장고분(長鼓墳) 이야기이다.
◆ 장고분(長鼓墳)의 유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는 장고분이 있다. 이 장고분은 영산강 유역 마한 유적지에서 발견된 14기의 고분으로 그중 2기가 광주 첨단지구에서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앞쪽은 사다리꼴, 뒤쪽은 둥근 형태의 열쇠 구멍 모양으로 만들어진 무덤으로써 한국에서는 장고 모습을 닮았다 하여 장고분이라 불렸는데, 일본은 이 고분이 일본열도에 존재했던 야마토 정권의 독창적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전방 후원분인 인덕천 황릉은 길이 486m 주변의 주구(도랑)까지 합치면 1㎞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무덤이자 일본의 상징이라고 한다. 이 ‘전방후원분’은 3~7세기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정권이 각 지역의 부족들을 정복해가면서 조성한 무덤으로 일본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고분이 광주광역시 월계동·명화동 고분을 비롯해 한반도 남부 영산강 유역인 영광, 함평, 담양, 광주, 나주, 영암, 해남 등지에서 14기의 장고분이 발견된 것이다. 이 장고분은 무덤의 구조와 형태, 출토된 유물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해 한국과 일본의 고대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았으나 일본의 극우 사학자와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이 장고분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 역사학자들은 연구와 고증을 통해 장고분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장고분의 주인이 누군가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월계동 장고분(1호분)/광주광역시 첨단지구 소재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01_5547.jpg)
◆ 광주 월계동 장고분
광주 첨단 과학산업단지가 조성될 무렵인 1993년 월계동에서 2기의 장고분이 발견되자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장고분에 대한 1차 발굴조사가 이뤄진 이후 1995년 2차, 1997년 3차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발굴 당시 장고분(1호분) 석실의 천장은 무너져 내려앉아 있었고 석실 내부는 이미 도굴되었으며 봉토는 허물어져 있었다. 현재 복원된 봉분의 전체 길이는 45.3m, 높이 2.8~6.1m, 너비 14.2~5.5m, 깊이 1.5m 내외이며, 주검을 안치한 석실(돌방)은 원형의 분구에 있고 석실의 크기는 널방 길이 4.5m, 너비 2.8m, 높이 2.7m. 널 길이 2.8m, 너비 1.4m, 높이 1.6m 내외이다.
장고분(2호분)은 1호분의 약 75% 크기이며 경작과 도굴로 많은 부분이 깎여 있었다. 현재 복원된 봉분의 전체 길이는 34.5m, 높이 1.5~3.5m, 너비 4.5m~8.5m, 깊이 1m. 석실의 크기는 널방 길이 3.8m, 너비 2.4m, 높이 1m 내외이다.
![월계동 장고분 출토 유물/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재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02_5727.jpg)
![월계동 장고분 석실의 모습/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재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03_588.jpg)
![월계동 장고분 주구(도랑)에서 출토된 유물/전남대학교 박물관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04_5842.jpg)
월계동 장고분(1-2호분)은 주검을 안치한 석실이 있었으며, 석실과 무덤 주변의 주구(도랑)에서 철도자 편, 적갈색 원통형 토기, 나팔형 토기, 토기 조각, 유리구슬 등의 유물들이 파손된 채 출토되었으나 상당수의 유물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이 고분은 5~6세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출토된 유물은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현재 장고분의 모습은 발굴조사가 이뤄진 이후 원형을 복원해 유적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 고분을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릉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 구릉이 우리의 전통악기인 장구(장고)와 비슷해 예로부터 장고분이라고 불려왔으며 주변 마을 이름도 장구 촌이었다고 한다. 당시 장고분 주변에는 논과 밭 과수원이 있었고, 장고분 입구가 토굴처럼 생겨서 한국전쟁 당시 방공호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월계동 장고분 관련 자료/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재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05_5954.jpg)
![월계동 장고분 발굴조사 현장/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재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06_031.jpg)
◆ ‘장고분’과 ‘전방후원분’에 대한 논증
고분은 그 민족을 대표하는 정체성을 말해준다.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은 일본 야마토 정권의 ‘전방후원분’의 형태와 비슷하다. 그래서 일본의 극우 세력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장고분을 <임나일본부설>의 강력한 증거로 믿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타호정 고분은 3세기경 이 지역 귀족의 무덤인데 동그라미 두 개가 합쳐진 모양이 일본의 전방 후원분과 비슷한데 이런 형태의 무덤은 한반도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일본이 자랑하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열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광주광역시 월계동 ‘장고분’은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주구(도랑)가 있는데, 이것은 ‘전방후원분’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은 ‘장고분’을 일본 고유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일본의 모든 문화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에 ‘전방후원분’이 일본에서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주구(도랑)가 있는 고분이 한반도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1996년 충남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는 일본의 주구묘보다 최소 100년 이상 앞선 시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사실은 일본 고대문화의 상징이자 자부심으로 여기던 전방 후원분의 기원이 한반도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명화동 장고분
1992년 화동마을 주민의 신고로 국립광주박물관에서 3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광주광역시 명화동 장고분은 삼국시대(6세기)의 고분으로 봉분과 도랑의 모양 등이 일본의 전방 후원분과 유사했다. 이 장고분에서는 금동제 귀걸이, 철제 화살촉, 철제도끼, 원통형 토기, 접시, 병 등 6세기 무렵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출토된 원통형 토기가 일본의 전형적인 토기인 하니와 토기(토기에 구멍을 뚫은 토기)와 유사해 일본의 극우 사학자와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이 장고분의 주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일본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석실 내에서 출토된 금동제 귀걸이, 쇠화살촉과 쇠 파편 등의 유물을 보면 당시 장고분의 주인은 마한계 유력 토착세력이거나 백제에 머물러있던 왜인 계 무장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신덕 장고분
1991년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에서 신덕 장고분이 발견되는데, 고분의 돌 방 벽면은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방후원분’ 고분 양식이다. 이것을 근거로 일본의 극우 사학자와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장고분의 주인이 일본인이고, 전남지역의 일대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덕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백제왕실에서 하사한 목걸이 귀걸이 등 유물과 일본계 무인일 가능성을 암시하는 일본식 대도와 갑옷 등 무기류 파편 등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당시 백제 조정은 각 지역에 지방관(담로)을 파견하면서 통치자에게 금동관을 하사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보아 장고분의 주인은 백제왕실과 관계를 맺은 백제 고위관료이거나 왜인 계 백제인이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 당시 왜인 계 백제 관료는 백제의 선진문물을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에서 말과 군사, 군수품 등을 가져와 백제에 제공한 도래인이었다. 이 도래인들은 ‘왜’의 규슈에 진출해 호족으로 성장한 백제나 가야인이었다. 이 호족들은 문명이 발달한 백제에 자식들을 유학시켰고, 그 자식들은 백제 관료로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에 특정한 세력을 가진 외부세력은 통치집단이 아닌 왜의 임시조직으로 존재했었다는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현재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당시 마한지역의 여러 고분에서 백제 금동관이나 부장품 등이 출토돼 백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떠한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남 영산강 유역에 정착한 왜인들은 백제와 마한 세력에게는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고, 단기적으로 왜인 계 문화를 형성·유지하다가 한반도에 동화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일본의 고대사 왜곡,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임나일본부설>이란 왜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369년) 한반도 남부지역 임나(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관을 두고 562년까지 200여 년간 신라와 백제 등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일본의 극우 역사학자와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369년 일본의 ‘진구황후’가 한반도에 군대를 보냈다. 왜군은 7국과 4읍을 점령하고 임나(가야)에 일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는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라고 기록한 <일본서기>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 이론의 배경은 신라와 가야의 전쟁이었다. 당시 가야와 신라는 낙동강 하류를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면서 1세기부터 수백 년 동안 서로 적대적 관계였다. 그 당시 가야와 왜는 철을 교역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신라가 가야를 공격하자 가야는 왜에 지원을 요청했고, 왜는 가야에 지원군을 파견하는데 일본은 바로 이 대목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이다.
가야의 요청으로 ‘왜’가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맞지만, ‘왜’의 군대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4세기) 야마토 정권은 국가 형태도 갖추지 못한 호족의 연합정권으로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 여러 제도와 물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기틀을 형성해가는 약소국에 불과했다. 당시 ‘왜’의 군대는 가야를 돕기 위해 한반도에 용병으로 파견 나온 것일 뿐, 어떠한 지배세력이 될 수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346~375)은 마한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6세기경 한반도 남부지방 정세를 살펴보면 가야 소국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만약 가야 소국들이 ‘왜’의 식민지이었다면 가야가 신라의 공격을 받을 때 ‘왜’가 신라와 대항해야 했는데 그런 기록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임나일본부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구임을 알 수있다.
또한,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가 ‘전방후원분’을 조성했을 때는 4~6세기로 당시 일본의 국호는 ‘왜’였고, 일본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다. 실제 일본이라는 국호는 701년대에 당나라 측천무후에 의해 승인된 것이다. 즉, 삼국시대(1세기~7세기)에는 ‘일본’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369년에는 <임나일본부>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수 없는 허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왜’는 한반도 서부 영산강 유역과 가야 소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기록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에 한자가 도입된 것은 5~6세기이고 그 이전에는 기록할 수 있는 문자가 없었다. 즉,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백제나 신라가 일본의 신하 국인 것처럼 기록하고, 가야 소국들을 일본의 식민지처럼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 구전을 기록한 것으로써 역사적인 실체가 불 문명하고 신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369년에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라는 720년대의 <일본서기>의 기록은 조작되거나 왜곡된 것이라는 것이 일본 역사학자와 한국 민족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런데 에도막부 시대(17세기 초) 이후 일본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창해오다가 ‘광개토대왕 비문’과 ‘장고분’이 발견되자 일본의 극우세력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근거라고 주장하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왔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민족사학자들에 의해 <임나일본부설>의 조작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자 일본의 극우세력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증거수집에 나서보지만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한일역사 공동연구위원회>는 2013년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하고 <임나일본부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학설이라며 폐기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일본의 극우세력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지금도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비문, 장고분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우기는 한·일 고대사 왜곡에 대해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반박하고자 한다.
한일역사학자들이 주장한 임나 위치설/사진 출처 STB 상생방송
첫째, 『일본서기』이다. 일부 일본 역사학자들과 한국의 민족사학자들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를 조작된 역사서로 보고 있으며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부정한다. 또한, 『일본서기』를 보면 “서기 371년 무렵 백제의 근초고왕이 야마토 정권의 사신이 오자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면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라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그러나 4세기(371년)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신라·가야와 대립하면서 왜의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으며,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강대국이었고,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은 371년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보면 당시 백제는 국력이 가장 번성한 때였다. 그런 시기에 철을 생산하지도 못한 빈약한 부족 연맹체인 ‘왜’의 야마토 정권을 향해 백제 국왕이 머리를 조아렸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역사 왜곡이라는 것이 현 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
또한, “임나는 쓰쿠시국(북 규슈)에서 2,000리나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임나’의 위치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아니라 대마도라고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확신한다. 또한, “임나 4현이 백제와 가까이 이웃하여 아침저녁으로 다니기 쉽고 닭과 개 주인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다”라고 기록한 <일본서기>를 근거로 북한 역사학자들임나 4현의 위치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민족이 일본 오카야마현으로 진출해 각자 분국을 세웠는데 이 분국 중 가야인이 세운 분국이 ‘임나’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한·일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의 위치가 한반도 남부 김해라는 설, 북 규슈 지방이라는 설, 오카야마현에 위치한다는 설, 대마도라는 설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일본의 극우세력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며 지금도 한·일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 [사진=네이버 캡처]](/news/photo/202502/210071_199609_99.jpg)
둘째, 광개토대왕 비문이다.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신라 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이라 새겨진 내용이다.
일본 극우 사학자들은 손상된 글자를 가야(임나)라고 주장하며 이 비문을 “왜가 신묘년(391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며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다. 다만 광개토대왕비문을 보면 ‘왜’가 한반도를 침략한 기록과 『삼국사기』에 “왜 가 신라(서라벌)를 공격하니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격퇴했다”라고 새겨진 문구가 있다.
당시 신라는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다. 이에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여 명을 신라에 파견해 왜구를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왜군이 금관가야 지방으로 후퇴하자 고구려군은 금관가야까지 진출해 왜구를 격파했다. 이후 금관가야는 힘을 잃고 532년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된다.
이에 대해 한국의 얼을 강조한 정인보 선생은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일본의 왜곡된 주장에 대해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온 왜를 격파하고 백제, 가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며 반박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고 드높이기 위해 만든 비석인데, 왜를 주체로 하여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비문을 새긴다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은 일본인이 광개토대왕 비문을 조작해 자의적으로 해석해 역사를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의 역사 왜곡은 시대적인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4세기경 ‘왜’는 야마토 국 등 100여 개의 소국이 영토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당시 ‘왜’의 소국들은 식민지를 경영할 능력도 없었고 철을 생산할 능력이 없어 단검, 화살촉, 창촉 등 단순한 무기만 만들었고, 철갑기마병도 없어 군사력도 미약했다. 그러나 가야는 2~3세기경 김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6개 부족의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5세기에는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하고 높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철갑기마병과 장검으로 무장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경제·군사력으로 ‘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나라였다. 다만, 백제와 왜는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였고,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을 받을 때 ‘왜’에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한 사실은 있었지만,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왜’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역사를 거짓으로 기록한 조작된 학설이라는 것이 일본의 역사학자나 한국의 민족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월계동 장고분(2호분)/광주광역시 첨단지구 월계동 소재 [정성환 기자]](/news/photo/202502/210071_199610_1046.jpg)
셋째, 한반도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장고분>이다. 4~6세기 야마토 시대 왜인들은 열쇠 구멍과 같은 장구 모양의 ‘전방후원분’ 형의 고분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통무덤은 원형인데, ‘왜’가 조성했던 ‘전방 후원분’ 형태와 비슷한 장고분이 한반도 남부의 광주, 나주, 함평, 해남 등 영산강 유역 14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왜인들이 사용한 것이고, 그 장고분의 주인이 당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일본인이라며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가 위치한 경남 인근(아라가야)에서 <임나일본부설>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하는 장고분(전방 후원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가야의 고분은 대부분 원형이었고 장고분은 전남 해안 영산강 주변에 1~2개씩 14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이 장고분에서 백제의 하사품으로 보이는 백제왕실과 관련된 부장품들이 다수 출토된 것으로 보면 백제가 웅진 천도의 혼란기에 마한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한 왜인 계 무장들의 흔적이라고 민족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외 장고분의 주인에 대해서는 한반도 남부 토착 권력자라는 설, 일본의 야마토 정권과의 전쟁에서 패한 일본의 규슈 세력들이 한반도 남부로 망명해 축조했다는 설, 왜인 계 관료가 영산강 유역 마한지역에 파견돼 사망하면서 장고분을 조성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역사 왜곡
일제강점기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저력을 실감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지배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제는 대한제국의 민족혼을 단절시키기 위해 단군 조선의 실존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이러한 역사 왜곡에 동조한 세력들이 일제 식민사관에 입각한 식민사학자였고, 식민사학자들의 중심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하수인 조선사 편수회가 있었다. 지금도 그 뿌리는 깊고 깊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과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일제 식민사관 논리를 내세우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을 분열시키고 있다.
또한, 2006년 이후 일본의 아베 정권의 극우세력과 식민사학자들은 과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지배한 사실을 근거로 그들의 조선 침략은 침략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임나일본부설>이라는 학설을 다시 끌어와 “4세기 후반 야마토 정권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해 한반도 남부의 임나(任那)라는 곳의 세력권을 차지했다.”라는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한·일 고대사를 왜곡하고 일제강점기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학생들에게 거짓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이제 일본의 극우세력은 물론 대한민국 강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제 식민사학자들도 일제 식민사관의 논리에서 벗어나 올바른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관을 되찾고, 우리 모두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