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의 숨결을 간직한 '광주역사민속박물관'...광주 읍성 이야기

광주전남 민속문화의 근·현대 역사 이야기 빛고을 광주 명칭, 고려 태조 23년(940)에 첫 등장 고려사 광주 지명...광주-해양 현-익주-화평 부-광주 목 등 1500년 동안 연면히 이어져...

2022-02-10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4]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광주전남 민속문화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근·현대 역사실의 광주 읍성 이야기다.

광주 역사민속박물관 이야기는 △1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생활환경) △2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사회문화) △3편 근·현대 역사전시실(광주읍성) △4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조선시대 사회문화) △5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일제강점기 충장로와 금남로)로 연재 중이다.

◆과거와 현재의 숨결을 간직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제3편 광주읍성 이야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광주광역시

▲근·현대 역사실(광주 읍성)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 동성왕 20년(498) 광주 최초의 이름은 무진주(武珍州)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9주의 하나로 승격되고 무진주는 ‘무진도독부’가 되면서 광주광역시의 출발점이 된다.

빛고을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처음 등장하고 「고려사」에 나타난 광주의 지명은 광주-해양 현-익주-화평 부-광주 목 등으로 바뀌면서 1,500년 동안 연면히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광주는 한국역사의 격동기에 선구자 역할을 하며 의(義)로운 고장, 민주화의 성지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동안 광주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공간이 없어 시민들의 오랜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이런 시민들의 소망을 담아 근·현대역사 실에는 조선 시대·일제강점기·광복 후의 역사 공간을 구성하여 소개하고 있다.

광주
1900년대
1900년대
광주

광주민속박물관에서 1996년과 1997년에 황금동과 광산동의 읍성 터 일부를 발굴 조사하여 성벽의 기단부를 확인하였는데 폭은 3.4~4m였다. 광주 시가지 정화사업으로 현지 보존이 어려운 성벽 돌의 일부를 1997년 8월 이곳에 이전·복원하였다.

광주 읍성은 조선 시대 단종 2년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며 2008년 광주 읍성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축조되었고 1900년대 초반에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500년 이상 버티어온 광주의 4대 문과 읍성은 1916년 일제에 의해서 완전히 헐리고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광주 읍성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금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시작으로 장동로터리를 거쳐 전남여고 후문, 중앙초등학교 후문, 충장파출소, 광주세무서, 남동 구 시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한다.

1879년에 간행된 『광주읍지 光州邑誌』를 보면 광주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둘레는 약 2,5km, 높이는 약 2.8m, 내부면적은 10만여 평이며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는 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읍성 안에는 각 성문을 연결하는 십(+)자 형태의 길이 있었고 그중 남문과 북문을 통하는 길이 지금의 충장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안은 성내방(城內坊)이라 하여 관아를 중심으로 5개의 동네에 1,000여 명이 살았으며 성 밖으로는 시장과 공동묘지, 사직단, 성황당 등 수십 개의 동네가 있었다고 한다.

1872년도에 제작된 「광주지도」를 보면 성문들은 각기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 동문은 서원문, 서문은 광리문, 남문은 진남문, 북문은 공북문으로 표시하고 있다.

읍성 안과 밖에서는 중인 이하의 신분인 관원과 아전, 병졸 그리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5,000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며 양반들은 읍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금남로 1-3가, 충장로 1-3가, 황금동, 궁동, 대의동 등이 읍성 안에 속했으며 읍성의 번화가는 동·서·남·북이 만나는 현 충장우체국 앞 사거리(우다방)였다.

광주 읍성은 1900~1910년대에 걸쳐 서서히 허물어지고 1916년 일제에 의해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완전히 철거되어 읍성의 모습은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광주의 인구는 1916년 1만여 명, 1945년 8만여 명, 1980년 70여만 명, 현재 150여만 명의 거대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광주

광주 석판 글씨는 1986년 전라남도에서 분리되 ‘직할시’로 승격됐을 때 계림동 시청사 벽면에 설치된 것이다.

△ 절양루(折楊樓)
‘절양루’는 조선 시대 광주를 오고 가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으며 지금의 충장로 5가 끝 지점인 광주일고 내 광주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는 사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절양루란 광주와 한양(북쪽)을 이어주는 문이란 뜻으로 ‘공북루’ 또는 ‘누문’이라고도 불렸으며 절양(折楊)이란 ‘버드나무를 꺾는다.’란 뜻으로 이별의 아픔과 재회를 바라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이 누각은 광주 읍내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첫 번째 만나는 관문이었으며 광주 읍내를 떠나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관문으로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기쁨과 슬픔의 장소였고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여기에서 광주로 새로 부임하는 사또, 조정에서 출장 나온 관리, 과거시험 합격자를 맞이했다고 한다.

또한 절양루는 임진왜란 때 고종후(1554~1593)의 의병부대가 이곳에서 진주성으로 출정했고, 병자호란 때는 유평(1577~?)의 의병부대가 이곳에 모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던 의(義)로운 광주 역사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공북루 앞에는 넓은 유림 숲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1910년) 때 없애버렸고 지금은 ‘유동’과 ‘임동’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절양루 터 주변이 누문동이라는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돌장승/와주성선(좌),

장승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나무나 돌로 만든 조각상을 말한다.

전남여자고등학교 벽돌담 안과 개인 집 안마당에서 서로 마주 보던 돌장승은 본래 광주 읍성의 동쪽을 지키는 지킴이였으나 1967년에 전남대학교로 옮겨왔다.

험상궂은 민속 장승과 달리 얼굴 모습이 온화하고 의관도 유학자 풍으로 조성되었으며 와주성선(蝸柱成仙)은 근엄하나 짓궂은 표정이고 보호동맥(補護東脉)은 단정하고 깔끔함을 갖춘 표정이며 상대적으로 젊어 보인다.

이 한 쌍의 돌장승은 모두 관모를 쓰고 있으며 남성이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역사적 학술 가치를 중요시하여 광주광역시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서원문(瑞元門, 동문)

‘서원문’은 광주 읍성의 동문으로 지금의 전남여고 후문 쪽에 있었다고 한다.

서원문은 ‘좋은 기운이 깃든 문’이란 뜻으로 광주의 별칭인 서석(瑞石)과 동쪽을 뜻하는 원(元)을 조합해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서원문 앞에는 원래 ‘와주성선(蝸柱成仙)’과 ‘보호동맥(補護東脉)’이란 글귀가 새겨진 ‘돌장승’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며 ‘돌장승’은 현재 전남대학교 대강당 앞에 전시돼 있다.

‘돌장승’은 홍수를 다스리는 신인 여와(女蝸)가 장승이 되어 땅 기운이 약한 서원문(瑞元門) 밖 동계 천을 지켜 홍수로부터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비보(裨補)의 마음으로 장승을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여와(女蝸)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상의 황재 복희의 부인으로 홍수를 다스리는 신이었다고 전한다.

△광리문(光利門, 서문)

‘광리문’은 광주 읍성의 서문으로 예전 ‘황금동 콜박스’ 사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광리(光利)란 ‘좋은 기운을 받아서 하는 일이 잘되게 해주소서’라는 뜻이며 광주 읍성의 4대 문 가운데 제일 먼저 철거되었다고 전한다.

1900년대 일본인들이 광주 시내에 들어와 ‘광리문’ 주변에 정착촌을 만들면서 통행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했으며 광리문 일대에는 일본인들의 유락장소와 술집들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황금동과 불로동 일대가 유흥가인 것은 이때의 영향이라고 전한다.

선정비/천년완골/전남대학교

△진남문(鎭南門, 남문)

광주 읍성의 남문으로 지하철 문화전당역 6번 출구 근처인 옛 대성학원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진남(鎭南)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남쪽을 지킨다’ 또는 ‘남쪽을 평정한다’는 뜻으로 조선 시대에는 성(城)의 남문을 ‘진남문’으로 부르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진남문’ 밖에는 이러한 염원을 담은 석비(石碑)인 ‘진남비’가 세워졌는데 역사의 흐름 속에 진남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석비(石碑)만 홀로 남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정에 보존되어 전하고 있다. 원래 이 비석은 17세기 광주 사또를 지낸 ‘신익전’의 선정비(善政碑)로 세운 것인데 비석 뒤쪽에 천년완골(千年頑骨, 영원토록 이곳을 굳건하게 지켜주소서)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10년대

△공북문(拱北門, 북문)

‘공북문’은 광주 읍성의 북문으로 현재 ‘충장치안센터’ 앞에 있었다고 한다.

공((拱)이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절한다’라는 뜻이고 북(北)은 북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임금을 올려다보는 방향이 된다.

즉, ‘공북’은 신하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절을 올린다는 뜻이라 한다.

지금의 충장로 4가를 옛날에는 ‘시리(市里)’라고 불러다고 한다.

‘시리’란 ‘장터 마을’이란 뜻으로 광주에서 맨 처음 장이 열렸던 데서 비롯된 이름으로 훗날 이 장이 광주 천변으로 옮겨가면서 큰 장터와 작은 장터가 되었다고 한다.

△광주 관아(동헌, 東軒)와 사또

관아의 위치는 현, 금남로 1가 전일빌딩과 동부경찰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관아는 오늘날 광주광역시청에 해당하는 곳으로 ‘동헌(東軒)’이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에는 사또의 집무실 외에도 여러 관아 건물들이 모여 있었다고 하며, 관아의 최고 수장은 ‘사또’로서 오늘날의 시장·교육감·판사·경찰서장·세무서장 등의 일을 혼자 처리했으며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광주에는 약 200명의 사또가 부임했다고 한다.

또한 관아에는 아전과 포졸 등 관리 170여 명, 노비 50여 명, 기생 20여 명이 있었으며 아전은 세금징수와 인구조사 등을 했고, 군관은 지역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몇몇 집안이 아전과 군관 자리를 독차지하며 세습했다고 전한다.

아전은 관리가 아니고 월급도 없었기 때문에 공무 수행 중 수고비로 생활하거나 세금을 착복하여 농민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광주 관아는 1896년 전라남도 관찰부로 사용했으며, 일제강점기 때 일본 경찰본부인 경무부, 일본군 헌병대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건물이 훼손되거나 철거되었다고 한다.

△하모당(何暮堂)

광주 관아 정문에는 ‘제금루(製錦樓)’라는 누각이 있었으며, 광주 목사의 집무실인 ‘하모당(何募堂)’이 있었다고 한다.

하모당은 1610년 ‘홍명원’이 광주 사또로 있을 때 지금의 5·18 광장이 있던 곳에 지었다고 한다.

‘홍명원’의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뒤 다른 관아 건물들을 모두 재건하고 자신의 집무실인 이 건물을 가장 나중에 지었기 때문에 ‘하모당’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 건물은 1910년까지 전남 관찰사의 집무실로 사용되면서 선화당(宣化堂), 서석헌(瑞石軒)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상품전시관으로 사용되어오다 건물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그 흔적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광주

△광산관(光山館)

‘광산관’은 광산 객사(客舍)로 충장로 1가의 옛 무등극장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명절 때면 관리들이 임금을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객사 건물 가운데에 전패(殿牌)를 모신 정청(政廳)을 두고 좌·우에 날개처럼 건물이 있었는데 오른쪽은 동익헌(東翼軒), 왼쪽은 서익헌(西翼軒)이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 객사는 고을을 방문한 국내·외 사신이나 고위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이때 방문자가 문관이면 동익헌을, 무관이면 서익헌을 사용했다고 하며 객사(客舍)의 한자표기는 여기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또한 객사는 전라 관찰사가 도정을 파악하고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했을 때 직무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과거시험을 열기도 했는데 1798년 정조의 특별지시로 치른 과거시험도 객사인 광산관(光山館) 앞뜰에서 치러졌으며 고경명 장군의 7대손인 고정봉(1743~?) 선비가 장원급제했다고 전한다.

객사의 이름은 해당 고을의 별호를 따서 붙이곤 했는데 나주는 금성관, 장성은 오성관, 담양은 추성관, 함평은 기성관이라 했고 광주는 광산관(光山館)이었다.

광산관(光山館)의 운명은 조선의 운명과 같았다. 일제강점기 객사는 많은 시련을 겪다가 1909년 객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객사는 1920년대 초반까지 전남지방재판소, 광주 군청, 광주 고등보통학교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군청이 1922년 대의동(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지 내)으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어 조선 시대 광주 시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광주 객사 광산관(光山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1931년 이곳에 ‘제국관’이라는 극장이 생겼는데 해방 후 무등극장이 됐다고 한다.

△황화루(皇華樓)

황화루는 광주 객사 ‘광산관’의 정문으로 2층 누각 형태로 옛 도청과 서석교 사이의 도로인 서석로 옆에 있었다고 한다.

‘황하’는 고대 중국의 고전 『시경』에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불렀다는 노래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광주 군청 등으로 사용되었고 1913년 일제는 이 누각을 뜯어다가 동명동에 있던 광주형무소로 옮겨 간수(교도관)훈련소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가 해방 후까지 황화루는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나마 광주형무소 정문 앞에 있다가 1971년 교도소가 동명동에서 문화동으로 이전할 때 철거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관덕정/등록문화재

△관덕정(觀德亭)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희경루는 객사의 북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관덕정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덕(觀德)이란 말은 조선 시대 활터에 딸린 관아 건물로써 「예기」에 나오는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 쏘는 것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 것)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관덕정이란 조선 시대 양반들이 활쏘기로 심신을 단련하며 사교모임 장소로 이용했으며 흔히 ‘우다방’이라 불렀던 지금의 충장로 우체국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관덕정’ 자리에는 1450년대에 ‘희경루’라는 2층 누각 건물이 있었는데 중간에 이름을 ‘관덕정’으로 개칭했고 건물도 단층건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1567년(명종1) ‘희경루’에서 모임을 개최한 계회도(契會圖)인 「희경루방회도」가 보물 제1879호로 지정되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1961년 광주사직공원에 ‘관덕정’이란 활터가 신축되어 일반 시민들이 활쏘기 체험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누상고(樓上庫) 누하고(樓下庫)

누상고 누하고는 조선 시대 문서 보관소로 사용된 건물로 현재 ‘황금동 콜박스 사거리’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2층 건물이었으며 1층 ‘누하고’에는 군 복무와 관련된 문서들이 있었고, 2층 ‘누상고’에는 주민등록과 관련된 호적문서들이 보관돼 있었다고 하며 1층과 2층 건물에 문서를 따로 보관한 이유는 문서가 세금을 부과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읍창(邑倉)

‘읍창’이란 사창 또는 ‘억만고’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조선 시대에 세곡(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를 뜻한다.

광주에서는 이처럼 세곡을 받아 보관하던 창고가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읍성 안에 있는 것을 ‘읍창’이라고 불렸으며 충장로 3가 옛 가든 백화점( 현 와이즈 파크)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동창(東倉)은 동쪽에 있는 창고로 광산구 첨단지구 ‘무양서원’ 자리에, 서창(西倉)은 서쪽에 있는 창고로 지금의 광산구 서구 서창동 창등(倉嶝) 일대에, ‘군향창’은 장성 입암산성에 있어 군량미를 비축했다고 전한다.

1900년 읍창 건물을 이용해 미국의 선교사들이 ‘북문안교회’을 세웠으나 교인들이 3·1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교회는 일제에 의해 폐쇄되고 읍창은 철거되어 상가로 이용했다고 한다.

△향교평(鄕校坪)

‘향교평’은 금남로 3가 옛 광주은행 본점이 있는 곳으로 향교가 있었던 곳이다.
원래 광주 향교는 읍성 밖 풍향동에 있었으며 풍향동이란 이름 자체가 본래 향교가 있었던 동네라는 뜻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풍향동의 향교는 읍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향교를 오가는 사람들이 맹수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일이 많아 읍성 북문 안으로 향교를 옮겼는데 북문 밖에 시리(市里)라는 장(현 충파 맞은편 일대)이 서면서 소음이 심해 공부하는데 지장을 주어 1480년대에 광주공원 옆 현재의 향교 자리로 옮겼고 이후 향교 자리를 밭으로 일궈 ‘향교평’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1910년 향교평에는 광주지방법원이 들어섰고 1960년 금남로 확장으로 법원부지가 도로에 편입돼 지산동으로 옮겨갈 때까지 이곳을 ‘법원통’으로 불렸다고 한다.

△조탄보(棗灘洑)

조선 시대에 광주천을 건천, 금계, 조탄, 서천이라고 불렸으며 광주천이란 이름은 1916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이름은 ‘건천’으로 1530년(중종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무등산 샘골에서 발원한 광주천의 물줄기는 용추계곡을 흘려 제2수원지를 지나 용연계곡을 흘러온 물줄기와 만나 광주천 상류를 형성하여 광주 중심부를 흘러 영산강에 합류한다.

이 하천에 농업용 댐인 보가 있었는데 이를 ‘조탄보’라고 했으며 현재 서석교(옛 적십자병원 앞쪽)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조탄보의 물은 수로(봇도랑)를 통해 계림동의 경양 방죽까지 이어져 광주 읍성의 ‘해자’로 활용했으며 농사를 짓는 데 매우 긴요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특별히 보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인 ‘보작촌’을 두었는데 현재의 불로동이 옛 ‘보작촌’이라 전한다.

조탄보가 있었던 광주천은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08년 2월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는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총살당하고 1919년 3월 10일, 3월 13일 광주천 백사장 작은 장터 큰 장터에서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당한 현장이다.

작은

△ 작은 장터

조선시대 광주 읍성 광주 천변 공터에는 2개의 장이 열렸으며 성문을 기준으로 서문 밖에서 열리는 장은 작은 장, 북문 밖에서 열린 장은 큰 장으로 구분해 불렸다고 한다.

작은 장은 소소한 생활용품을 사고파는 곳으로 광주천 부동교 아래 넓은 백사장에서 열렸으며 1919년 3월 10일 작은 장터에서 1천여 명이 참여한 광주 최초로 3·1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큰 장터

큰 장터는 도매시장으로써 무명베가 가장 활발하게 거래된 곳으로 공북루(광주일고) 근처에 열리다가 지금의 광주대교 천변으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 광주는 5천 가구가 살았는데 거의 모든 집에서 무명베를 생산하여 생계를 일궜는데 일제강점기인 1920년 광주천 직선화 공사로 그 터전을 서서히 잃고 1940년대 초 양동시장이 생기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큰 장터는 1919년 3월 13일 광주에서 두 번째로 3·1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